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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20일 11시 38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3월 22일 14시 12분 KST

신혼여행, 언젠가 한 번 더

노트북 앞에 앉아 한창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메일 쓰고 있는데 형에게서 카톡이 왔다. 우리 회사 임직원들 대상으로 하와이 항공권 엄청 할인해서 나온대! 우리 갈까? 알아볼까? 우와, 대박이네 올 여름 휴가 하와이 가면 되겠다. 빨리 예매 알아봐! 하와이는 우리가 신혼여행지로도 고민했던 곳인데, 비행기표까지 싸게 살 수 있다면 웬 떡이냐 하면서 질러야지. 그런데 잠시 후에 형에게서 다시 카톡이 왔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가족만 동반 가능하네... 가족관계 증명 서류가 필요하대...

노트북 앞에 앉아 한창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메일 쓰고 있는데 형에게서 카톡이 왔다. 우리 회사 임직원들 대상으로 하와이 항공권 엄청 할인해서 나온대! 우리 갈까? 알아볼까? 우와, 대박이네 올 여름 휴가 하와이 가면 되겠다. 빨리 예매 알아봐! 하와이는 우리가 신혼여행지로도 고민했던 곳인데, 비행기표까지 싸게 살 수 있다면 웬 떡이냐 하면서 질러야지. 아직 여름 휴가 시즌이 되려면 반 년은 남았지만, 언제나 휴가 계획은 일찍 잡을수록 좋은 것. 휴가보다 좋은 게 휴가를 기다리는 마음 아니겠는가. 그런데 잠시 후에 형에게서 다시 카톡이 왔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가족만 동반 가능하네... 가족관계 증명 서류가 필요하대... 엉엉 짜증나. 헉,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와이키키 해변으로 마실 나갔던 내 정신머리가 사무실 책상으로 금세 돌아오려니 참 아쉽다. 우리 부부가 부부임을 증명하라는 한국 사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차별받아 온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숨죽여 또르르 눈물만 흘리고 있어야지는 개뿔 아이고 화딱지나. 게이가 한을 품으면 정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거 모르나?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이상한 건 기분 탓이야.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가 급 나빠진 내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전화기에 저장된 우리 신혼여행 사진을 한 번 쭉 봤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형과 같이 찍은 사진은 다 숨긴 폴더에 넣어놨더니, 당장 눈에 보이는 폴더에는 죄다 풍경 사진이나 내 독사진밖에 없다. 곧 깨질 유리창처럼 파란 하늘 사진을 보니 2년 전 여름이 눈앞에 선하다.

아, 다시 가고 싶다.

결혼식을 여름에 올린 것도 사실은 신혼여행 때문이었다. 조촐한 홈 파티도 아니고 양가 식구와 친구들 수십 명 모아놓고 올리는 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됐든 회사에는 비밀인 결혼식이었고(우리가 게이인 걸 아는 친한 회사 동료들 몇몇은 와서 축하해 줬지만) 또 법적으로도 여전히 우리는 독신이었으므로, 우리는 임직원이 결혼을 할 때 회사가 지원하는 일체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었다. 여러 가지 중에서도 회사원에게 가장 절실한 것 중 하나인 휴가를 받을 수 없다는 건 참 치명적이었는데, 그렇다고 형이나 나나 아무 때나 연차를 일주일씩 낼 수 있는 아름다운 회사에 다니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2박3일 주말 도깨비 여행 갈 게 아니라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게이 커플 결혼식에 경조 휴가가 나오지 않는다고 결혼의 꽃인 신혼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선택의 여지 없이, 여름 휴가를 쓸 수 있는 시기에 맞추어 결혼하기로 했다.

하와이를 포함해 몇 군데를 고민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한국인들이 바글바글거리는 곳은 가기가 싫었다. 결국 이미 둘이서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는 발리에 다시 가기로 결정했는데, 웬만한 관광지는 지난번에 돌아다녔으니 우리는 한국인 안 돌아다니는 동네에서 느긋하게 우리끼리 쉬다 오자는 생각이었다.

'신혼여행'이라고 이름 붙여 가는 여행인데 돈 좀 덜 아끼고 좋은 데 가자! 라는 합의점에 도달하는 건 없는 형편에도 돈 쓰기 좋아하는 우리 둘에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악착같이 모아도 모자랄 판에 머리에 든 건 섹스앤시티니 가랑이가 찢어질 수밖에 하... 그렇게 발리 한적한 해변의 프라이빗 빌라에서 며칠을 묵게 되었다.

숙소를 예약할 때 허니문이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남자 둘이라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착해서 남자 둘이 체크인 하는 순간에도 어색함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만나는 직원마다 결혼을 축하한다고, 발리에서 행복한 시간 보내라고 인사하며 함박 미소를 지어 주는데, 투철한 직업 정신으로 만들어낸 맘에 없는 얼굴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진심 어린 모습이었다. 가족들 친구들의 축하와 축복을 담뿍 받고 출발한 여행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이런 인정에 얼마나 갈증이 심했는지 빌라 직원들의 따뜻한 축하가 그리도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당장 하루만 있어보니 아, 우리가 게이라고 저 사람들에게는 유별난 게 전혀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을 하든 해변에 나가든 리조트는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한산한 분위기였는데, 그렇게 많지도 않은 커플들 중에서 우리 말고도 다른 게이 커플이 또 있었다. 유럽에서 왔는지 남미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페인어를 쓰는 근육근육한 몸매의 남남 커플이었는데, 우리나 그 커플처럼, 얼마든지 많은 게이 커플들이 이곳에 왔다 갔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괜히 나 스스로가 날 구분 지어 생각한 것 같아 좀 머쓱하기도 하다. 우리를 축하해준 리조트의 직원들에게, 우리는 그저 발리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여행 온 행복한 커플들 중 하나였을 뿐일 텐데. 남자 남자든 여자 여자든 그것보다 중요한 건 지금 막 결혼식을 올린 신혼 부부라는 거였을 거다.

우리 딴에는 최대한 신혼여행 분위기를 내기 위해, 우리를 가뒀던 한국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보기 위해 꽤나 노력했다. 사람이 별로 없는 산책길에서는 손도 잡고 걸어보고, 확실히 우리를 보는 한국인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팔짱도 끼어보고, 옷도 평소보다 과감하게 둘이 매치해서 입어보기도 하고 하면서, 정말 별 거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하지 못하는 사소한 것들을 작정하고 해보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놈의 눈치 보는 근성은 거머리처럼 어딜 가나 내 곁에 있었다. 하 이놈의 카페베네 같은 근성. 편강탕 같은 근성.

사실 거기까지 가서 우리가 게이 아닌 척할 필요도 없었던 건데. 주변의 다른 커플들, 많은 외국인들과 일부 한국인들 중에서 우리 둘을 보고서 아, 사이는 좋지만 닮은 구석은 전혀 없는 형제가 발리의 프라이빗 빌라에 단 둘이 휴가를 왔나 보구나, 라고 생각할 사람은 어차피 없었을 거다. 우리가 손을 잡든 안 잡든, 이미 거기 있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커밍아웃이었는데, 뭐 하러 주변 신경을 그렇게 썼었을까.

근육이 티셔츠를 뚫고 나올 듯한 다른 게이 커플을 보면서 아, 언제쯤 우리 커플도 저렇게 근육질이 될 수 있을, 아니 아니, 언제쯤 저렇게 자연스러워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들은 멀리서 봐도 스스로를 검열하는 기제가 전혀 없어 보였다. 아침 식사를 하다가도 서로 손을 마주 잡고, 해변을 걷다가 근처 사람을 붙잡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둘이 항상 웃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 않았다. 아, 뭔가 나 때문에 우리나라가 스페인에 축구 5대 0으로 진 느낌이야...

우리는 해봤자 전화기로 셀카나......

하지만 난 우리의 두 번째 신혼여행이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게 10년 뒤일지 20년 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도 우리는 아마 따뜻한 바닷가로 가겠지만, 두 번째 신혼여행은 굳이 여름 휴가 기간에 가지 않고, 회사에서 경조 휴가를 받아 겨울 이맘때쯤 가야지. 그때는 우리 스스로를 지레 구분 짓지 않고, 검열 없이 표현하며 즐겨야지.

...... 어 그런데 그럼 그때까지 회사를 다녀야 한다는 말인가. 뭐지, 파란 하늘과 넘실대는 파도를 상상하는데 왜 더 슬퍼지는 거지 하...

(* www.snulife.com 에 게시했던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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