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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06일 10시 52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3월 08일 14시 12분 KST

종로의 기적

정말 별 게 아니다. 술 냄새 풍기면서 수다를 떨고 싶으면 종로가 좋겠고, 관절 빠지게 춤을 추고 싶으면 이태원이 좋겠다. 사진을 좋아하면 사진 동호회를, 탁구를 좋아하면 탁구 동호회를 찾아보면 된다. 그냥 게이들이 많은 곳에만 가도 스스로가 편해진다. 내 삶은 이게 전부라고, 내 운명의 데스티니는 어둠의 다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이들이 있다면, 절대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모르는 행복한 당신이, 당신이 문을 열면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라고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은데 이놈의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타이핑을 마무리할 수가 없.......

아무리 회사 일이 정신 없이 바빠도 한 달에 하루 이틀쯤 종로에서 오랜 이반 친구를 만나 술 한잔 할 여유가 없다면, 그게 어찌 게이 사는 재미겠는가. 내가 예나 지금이나 온 종로 바닥을 쓸고 다니는 게이는 아니지만, 넥타이 느슨하게 하고 셔츠 단추 하나 풀고 종로3가의 밤거리에 딱 도착하면, 왠지 모를 종로만의 편안함이 있다. 모교가 있는 동네에 간만에 갈 때마다 느끼는 마음의 고향 같은 느낌과는 비슷하면서 또 다른 종로3가만의 느낌적인 느낌. 남자 마초들 여자 마초들에 치이며 게이 감성에 상처 입기 일쑤인 사무실을 벗어나, 종로의 한옥 주점에서 남자를 남자라 부르며 그저께 인터넷에서 지른 셔츠랑 화장품 자랑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의 해방감이란!

얼마 전에는 내 가장 오랜 게이 친구 중 하나인 형을 만났다. 내가 아직 20대 초반이고 형이 아직 서른이 안 되었던 그때, 기숙사에서 슬리퍼 신고 캔맥주나 까며 후줄근이 우리의 참 모습인 척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그때도 크리니크로 세안하고 키엘 처발처발하던 게이였던 걸 서로가 아는 사이. 통화는 종종 했지만 이번에 본 건 거의 반 년만이었다. 서로 직장도 코 앞이라면 코 앞인데, 어른 둘이 만나는 게 이리도 어려웠다. (형, 내가 형이랑 술 마신 이야기를 글로 쓸 줄은 몰랐겠지만, 내가 형 아웃팅 할 것도 아닌데 허락 따윈 받지 않았다...)

형은 요즘 게이 축구 동호회에 들어가서 주말마다 재미지게 운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전에는 일반 축구 동호회에서 활동했었는데, 형 말로는 운동 강도가 너무 강해서 나왔다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멋있게 운동해봤자 딱히 영양가가 없어서 그랬던 거 아닐까 싶... 어쨌거나 새로 시작한 축구 동호회는 이전 일반 동호회보다는 덜 힘들게 운동하고 또 전체적인 수준도 조금 하향되어 있어서 가자마자 축구 잘하는 신입 총각으로 눈도장이 찍혔다고 하니, 이제 게 중에 괜찮은 남자 하나랑 썸만 잘 타면 형은 성공한 한 해가 되는 거겠다 싶다.

요즘 간간히 했던 연애도 계속 흐지부지 끝나서 잘 지내나 싶었는데, 어째 오랜만에 이야기 들어보니 이렇게 저렇게 이쪽 사람들도 자주 만나보고 재미있게 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흠칫 놀라기도 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게이 동호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종로 게이바에 앉아 사장님이랑 농담을 주고받는 건 내가 알던 7년 전 형의 모습으로는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다. 안정적인 삶을 누구보다도 즐기는 형이었기에, 20대 때는 벽장이 내 집이요 하던 사람이었으므로 여기도 게이 저기도 게이, 심지어 저 게이들은 내가 게이인 걸 다 알아, 이런 상황에선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륵 쓰러질만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젠 제 발로 게이들이랑 축구하고 뒤풀이가 재미있었다고 신나 있다니, 시간이 참 많이 지났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역시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내가 수 년째 옆에서 호들갑 떨면서 연쇄 커밍아웃을 하고 있질 않나 남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리고 있질 않나, 하여튼 온갖 떠들썩한 게이게이 짓을 하고 있으니 아, 저 게이지랄을 해도 평범하게 잘 사는 걸 보니 조금 문을 열어도 크게 두려울 건 없겠구나, 싶었으려나.

나야 20살 되자마자 발이 닳도록 남자들을 만나러 다녔었고(그때 그랬더니 이렇게 이른 나이에 정착을... 하, 이것은 기쁨의 눈물...) 또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일찌감치 커밍아웃을 했었으니 내 벽장은 딱 청소년용 사이즈였지만, 벽장을 어마어마하게 지어 그게 마치 내 집인 마냥 착각하고서, 그 속의 삶이 안락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안타까움이 크게 밀려오곤 한다. 반대로 좁은 벽장을 불편해하고 숨막혀 하면서 도저히 문을 열 용기를 얻지 못하는 게이들을 볼 때도 안타까운 건 마찬가지다.

[영화 "종로의 기적"]

2011년이었나, 종로의 기적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었다. 네 명의 게이가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였는데, 흔히 '게이 다큐멘터리' 하면 상상해볼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이 고스란히 다 담겨 있다. 어떻게 보면 뻔해 보일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그 뻔한 이야기가 그때도, 아직도 누군가에겐 너무나도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게이라서 힘들고, 여기 저기서 차별 받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해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연애도 하게 되고, 점점 게이 프라이드를 가지게 되면서 기적처럼 스스로 행복하다고 인정하게 되는 이야기. 다른 게 기적이 아니고, 벽장에서 한 걸음, 반 걸음이라도 나오는 거, 이게 바로 종로의 기적인 것 같다.

정말 별 게 아니다. 술 냄새 풍기면서 수다를 떨고 싶으면 종로가 좋겠고, 관절 빠지게 춤을 추고 싶으면 이태원이 좋겠다. 사진을 좋아하면 사진 동호회를, 탁구를 좋아하면 탁구 동호회를 찾아보면 된다. 그냥 게이들이 많은 곳에만 가도 스스로가 편해진다. 내 삶은 이게 전부라고, 내 운명의 데스티니는 어둠의 다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이들이 있다면, 절대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모르는 행복한 당신이, 당신이 문을 열면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라고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은데 이놈의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타이핑을 마무리할 수가 없.......

(형은 올해 공 잘 차는 총각이나 하나 ♡♡)

(* www.snulife.com 에 게시했던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