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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02일 10시 57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02일 10시 57분 KST

잠시 웅크리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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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를 오랜 시간 타면 구석진 곳이 필요하다. 종일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에 잠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온몸에 묻은 시선을 닦아내고 긴장은 풀어야 한다. 허리가 아파 눕거나, 간단한 의료적 처치가 필요한 사람도 있다. 모두에게 열린 공원과 광장도 좋지만 어떤 사람들은 '공공성 있는 구석'을 원한다. 내게 그런 공간은 '장애인 화장실'이다. 규정대로만 만들면 공간도 제법 넓다.

사용이 쉽지는 않다. 일단 찾기가 어렵고, 찾아내도 화장실에 청소도구가 가득할 때가 있다. 세면대 앞 손잡이에는 고무장갑과 앞치마가 널렸다. 어느 날 문을 열자, 중년의 여성 청소노동자가 "죄송합니다"라며 고개를 숙이고는 서둘러 물품을 챙겨 나갔다. 화장실 본래 용도로 사용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구석에서 뭘 하고 계셨을까.

일터에서 '구석'은 특히 절실하다. 관리자와 고객의 시선을 피해 휴식을 취하고, 음식을 먹고, 분을 삼키고, 몸을 웅크리고, 가족에게 전화를 하는 나만의 공간 말이다. 독립된 사무공간이나 조용한 직원휴게실이 있다면 좀 낫지만, 공공장소에서 주로 일하는 사람들은 잠시도 공중의 시선과 에너지를 피하기 어렵다. 청소노동자들은 아직도 지하철 승강장 한가운데 개방된 휴게공간에서 쉰다. 학생들의 발소리가 쏟아지는 대학 강의동 계단 밑에서 밥을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마저 없는 이들은 좁은 화장실에 개인물품과 청소도구를 보관하고, 그곳에서 쉬며 끼니를 때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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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화장실은 '장애인등편의법'(약칭)에 따라 일정한 재질과 구조로 설치된다. 원칙적으로 2005년 말 이후 신축된 건물의 장애인 화장실은 너비 1.4미터, 깊이 1.8미터 이상이어야 한다. 화장실이긴 해도 이 정도 면적으로 외부와 차단된 공중 편의시설은 흔치 않다. 서울 강남역 한복판이라도 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있는 건물주는 저 정도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구석을 찾던 나와 청소노동자가 마주치는 이유다. 부당하게 편의시설을 사용하지 못할 때 나는 정의감에 불타지만, 청소노동자의 개인물품을 화장실에서 발견했을 때는 민원을 제기하지 못했다(물론 장애인 화장실은 비워둬야 한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는 청소용역계약의 도급인이 용역업체의 위생시설(휴게시설 등) 설치에 '협조'할 의무만 있다. 계약관계에서 을인 용역업체가 '병'에 해당하는 청소노동자를 위해 갑인 도급인의 협조를 적극적으로 구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도급인의 협력을 의무화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과 별도의 환경미화원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법률안이 국회에서 발의된 바 있다. 법안은 제대로 된 논의조차 못하고 임기만료 폐기되거나 계류 중이다.

타인의 영향에서 차단된 구석 공간은 일과 생활에 지쳤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녔다. 몇 가지 검사 후 의사를 만나면, '괜찮아요. 잘 유지되고 있네요'라거나, '수술 날을 잡으시죠'라는 말을 들었다.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현재 삶의 연장 여부가 결정됐다.

용기를 내 부모님 손을 잡고 나아가도 일단 병원 정문을 통과하면 특유의 냄새와 함께 심장이 빠르게 뛴다. 긴장이 극에 달하면 엄마 화장실에 가고 싶어요, 라고 말하고 화장실로 내달렸다. 어린 내 몸은 작아서 좁은 화장실 한 칸이 넉넉한 구석이었다. 몸을 잔뜩 웅크리면 마음이 진정됐다. "괜찮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불안함을 추스르고 힘을 내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갔다. 장애인 화장실에서 나와 마주친 날, 비정규직인 그가 단지 지쳐서 그 공간을 찾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