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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05일 06시 26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8월 05일 14시 12분 KST

어느 전직 간호사의 안락사 선택

Julian Andrews/Eye R8

2015년 7월 21일 75세의 건강한 영국 여성이 늙어가는 건 끔찍하다며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했습니다. 지난 일요일 영국 유력지 더 타임스의 주말판(The Sunday Times)에는 질 파라오(Gill Pharaoh)라는 이 전직 간호사가 안락사가 불법인 영국을 떠나 스위스에 가서 안락사 했다는 기사가 실려 영국은 물론 우리나라에까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파라오는 회복이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는 통증완화치료 전문 간호사로 일하면서 노인들을 돌보는 법에 대해 두 권의 책을 펴내기도 했으며, 75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활동적으로 살았기에 그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스위스 바젤에서 선데이 타임스와 인터뷰하며 "나는 거의 평생 늙은 사람들을 돌봐왔어요. 나는 '결코 늙지 않을 거야, 늙는 건 전혀 재미있는 일이 아니야'라고 말해왔어요. 난 이제 나도 한물갔다는 걸 알아요. 좋아지는 일 따위는 없을 거예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늙는 것은 매우 암담한 슬픈 일이고, 사람들이 아무리 도우려 해도 노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며, "우리는 현실을 보지 않는데, 일반적으로 그건 아주 끔찍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건강하여 어떤 약에 의지하지 않고도 활동적으로 살고 있지만, 거의 지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빠지고 있다며, "최선의 삶을 살 수 없다면 퇴장하는 게 낫다"고 덧붙였다고 합니다. 그는 바젤에 있는 라이프서클 병원에 25년간 함께 살아온 존과 함께 가서 안락사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파라오는 죽음을 준비하면서 자신을 위한 비종교적 추모행사를 8월 하순에 치르도록 준비하기까지 했다니, 얼마나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julian andrews

질 파라오와 존.

파라오의 기사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이 덕에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한 번씩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늙어가는 나라이지만 노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하는 대신 죽음을 피하려고 합니다. 몸에 좋다는 먹을거리를 구하느라 혈안이 된 노인들, 건강을 위해 온종일 헬스센터에서 보내거나 등산에 여념이 없는 노인들, 노화가 수반하는 병에 민감하여 병원을 자기 집 드나들 듯 하는 노인들... 이런 노인들이 파라오 얘기를 들으면 미쳤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파라오의 선택을 미쳤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냥 살아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가족이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없다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파라오의 선택에 박수를 보낼지도 모릅니다.

스위스 취리히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2008년에서 2012년까지 스위스의 안락사 병원을 찾은 사람은 611명이고, 그 중 125명은 영국에서 간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나머지 486명 중에 한국인도 한두 명 있었는지 궁급합니다.

살려고 하는 의지는 벌레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이든, 모든 생명체가 나눠 가진 본능입니다. 자신의 삶이 쓸모없다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바퀴벌레나 민들레는 없을 겁니다. 어쩌면 자살이야말로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을 구별하는 중요한 잣대일지 모릅니다. 아직 세상을 채 살아보지 않은 젊은이의 자살은 막아야 하지만, 살 만큼 산 노인의 자살은 막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파라오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행기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언젠가 스위스 바젤로 마지막 여행을 떠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김흥숙의 생각>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