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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8일 12시 23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12월 29일 14시 12분 KST

폭력에 기여하지 않기

홍승희

일 년 전,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소와 돼지를 가득 실은 차를 봤다. 돼지와 눈동자가 마주쳤다. 돼지의 눈망울은 탁한 내 눈과 다르게 또렷하고 맑았다. '인간은 동물을 열등하다고 했지만, 도대체 저들이 뭐가 열등하다는 건가?' 생각했다. 육식이 새삼스럽게 잔혹해졌다. '이제 돼지를 먹을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 오랜 이동에 지친 나는 조금 전 마주친 돼지를 까맣게 잊고서 집 앞에 있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식당으로 들어갔다. 고기는 한입에 먹기 알맞았고, 김치와 함께 떠먹으면 꿀맛이다. 배부르게 에너지를 충전해 가뿐한 몸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 새벽 내내 구토를 했다. 장염이었다. 뱃속은 양심이 있었던 걸까. 그렁이던 돼지의 눈이 생각났다. 내 가벼운 양심에 구역질이 났다.

이후로 채식을 몇 번이고 다짐했지만, 이틀을 못 넘기고 고기를 찾았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려면, 뇌 회전을 위해 잘 먹어둬야 해. 고기를 먹는 건 인간의 자연 본성 아닌가. 종교에서도 동물은 희생 재물이 아니던가? 하느님도 인간을 먼저 창조했다는데. 사람도 살기 어려운데, 동물을 챙기느라 고단백질 영양소를 포기할 건가?' 생각했다. 또 치킨-맥주, 삼겹살-소주를 어떻게 포기할 수 있나. 어려운 자영업자를 위해서도 채식은 최선이 아니다. 육식은 내 합리적인 이성으로 정당화됐다.

그랬던 내가 10개월째 채식을 하고 있다. 영화 '잡식 가족의 딜레마'를 본 후부터다.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돼지와 닭들이 자루에 담겨 생매장된다. 그들은 생명이 아니다. 공장에서 상품으로 가공되는 물건이다. 인공정자를 투입해서 임신시키고, 새끼를 빨리 낳으라고 호르몬제를 통째로 꽂는다. 한평생 수백 마리를 임신, 출산하다가 버려진다. 인간이 동물을 이렇게 잔혹하게 부려도 될 만큼, 정말 동물은 인간보다 열등한가.

최근, 또다시 조류독감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했고 2500만 마리의 닭과 오리가 산채로 묻혔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기도만으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밥상에 올려지기까지 가공, 포장된 폭력은 고스란히 내 뱃속에 저장된다. 구제역, 조류독감 등 신종바이러스는 어떤 삶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 공장 사육을 중단 하는 게 선택의 문제일까. 변화는 취사선택의 문제일까. 모든 삶을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의 '현재'인데, 선택의 여지가 있는 걸까. 잔혹한 폭력은 기괴한 폭력으로 돌아온다.

구제역으로 돼지 수천 마리를 살처분한 공무원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 그는 생명을 대량 살상했고, 그 '임무'를 인간을 대표해 수행했다. 그들 또한 인간 폭력의 희생 재물이 아닌가.

페미니즘을 만나고 달라진 인식이 있다. 나 또한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 나는 여성으로서 차별받으면서 동시에 비인간 동물을 착취한 인간이다. 인간은 우월과 열등, 주류와 비주류, 중심과 주변으로 타자를 위계 세운다. 차별은 '합리적 이성'으로 정당화된다. 폭력의 원리다. 백인과 흑인, 서양과 동양, 문명과 야만,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이 그래왔다. 때문에 나는 비인간 동물이 나보다 열등하다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폭력을 정당화할 '합리적 이성'의 근거를 잃어버렸다.

'인간의 존엄'이 요즘은 공포스럽다. 인간우월주의와 이성과 합리성 찬양, 자기신화와 나르시시즘이 무섭다. 인간 존엄 말고 모든 생명의 존엄을 원한다. 인간이 우월해서 인간이 존엄한 게 아니라, 모든 존재가 존엄하니까 인간도 존엄한 것이므로.

채식하게 된 후 갈증을 자주 느껴 보온병을 들고 다닌다. 이런 변화는 삶에서 티끌같이 작지만, 내 습관을 뒷받침하던 인식과 사고방식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되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육식을 혐오하는 게 아니다. 육식하는 사람을 혐오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꼭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울었으면 좋겠다. 충분히 애도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가담한 폭력의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채식을 강요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나는 그냥 육식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비위가 약해졌다. 보이는 폭력이 많아졌다. 고통에 민감해졌다. 굳은살이 벗겨졌다. 육식을 하지 않아서 특별히 불편하지도 않고 건강이 좋아진 것도 아니다.

'채식을 하는 나는 결백해.' 하며 자기 위안하고 싶지 않다. 자기기만이 되지 않기 위해 나의 몸, 타자와 질문을 나누고 연대한다.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폭력에 내가 힘을 보태지 않기 위해. 모두가 가담한 폭력이다. 인간이 저지른 폭력이 너무 많다. 유토피아는 없다. 다만, 누구도 고통을 말하는 데서 배제되어선 안 된다. 말 못하는 동물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