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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1일 11시 20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2월 31일 14시 12분 KST

미친 사랑의 색깔은 '레드'

※ 이 칼럼은 1988년 당시 시점을 가정해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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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종합운동장에서 호돌이가 굴렁쇠를 굴리던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한 소년·소녀들이라면, 책받침은 온통 소피 마르소가 점령했을 가능성이 높다. <라붐>을 봤든 보지 않았든, 한국의 10대들은 이 싱그러운 프랑스 배우에게 수년째 맹목적인 애정을 바치는 중이다. 하지만 20~30대의 예술영화 관객들과 커피숍 사장님들, 그리고 영화 취향이 다소 '조숙한' 10대들이 열광하는 대상은 따로 있다. 바로 <베티 블루>의 베아트리스 달이다.

대학가 가게들은 도발적으로 눈을 치뜬 배우의 푸른 실루엣이 담긴 포스터를 현상수배 전단처럼 앞다투어 벽에 내걸어뒀다. 그 앞에 자리를 잡고 비엔나커피쯤은 곱빼기로 마셔줘야 어디 가서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86년작인 <베티 블루>가 국내에 소개되기까지는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세련된 포스터 이미지와 사실적인 섹스 묘사 덕분에 바다 건너까지 입소문을 탄 이 화제작은, 마침내 한국에서도 1987년 말에 개봉돼 올해(1988) 초까지 이어지는 겨울을 후끈하게 달궜다.

<베티 블루>는 첫 장면부터 확실하게 기선 제압을 한다. 주인공인 조르그(장위그 앙글라드)와 베티(베아트리스 달)의 전라 섹스신은 관객들로 하여금 숨쉬는 걸 잠시 잊게 할 만큼 대담하고 솔직하다. 게다가 충격적인 첫 등장 이후로도 두 배우는 툭하면 옷을 벗어젖힌다. 초시계로 재보지는 않았지만 벌거벗은 채 연기하는 분량이 러닝타임의 절반 가까이는 될 거다. 그렇다고 해서 의상 감독을 맡은 엘리자베트 타베르니에가 촬영 기간 내내 한가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면 곤란하다. 복잡한 디자인보다 선명한 색감에 집중한 듯한 주인공들의 의상은 '간간이' 등장할 때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장자크 베넥스는 레오 카락스, 뤼크 베송 등과 더불어 1980년대 프랑스 영화계의 새로운 경향인 '누벨 이마주'를 이끄는 감독으로 불린다. 입체적인 드라마 이상으로 감각적인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작품에서는 의상도 대사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한다. 조르그와 베티가 걸친 원색들은 극단으로 치닫는 그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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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서도 베티의 빨간 드레스는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베아트리스 달은 별다른 액세서리도 없이 단순한 디자인의 의상을 입고 같은 색의 구두를 신는다. 지루한 '깔맞춤'이 되기 십상인 차림이지만, 상체 부분을 멋대로 잡아 늘여 어깨를 드러내고 노란 자동차 위에 걸터앉은 배우를 보면 시야가 꽉 차는 느낌이다. 다루기 힘든 불덩이 같은 베티의 캐릭터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이미지라고 할까. 빨간 드레스는 영화의 마지막에 한번 더 등장한다. 이번에는 베티 대신 조르그가 이 옷을 입는다. 열정 때문에 미쳐버린 연인을, 남자는 그녀의 드레스를 입은 채로 살해한다. 세월이 30년 정도 더 흐르면 카페들도 더 이상은 <베티 블루>의 포스터로 실내를 장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베티의 빨간 드레스에 대한 기억은 2015년, 아니 2016년이 돼도 여전히 선명할 것만 같다. 전체 영화를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