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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09일 13시 50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5월 09일 14시 12분 KST

기억과 흔적-사라 폴리의 에 대하여

"저와 제 가족의 사연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어요. '정말 근사한 영화 소재인데?' 하지만 그건 제가 이미 본 영화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제 가족의 사연이 영화적 소재로서 흥미롭다고 느끼게 된 건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였어요.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는 가족사는 저나 식구들이 기억하는 과거와는 아예 다른 것이죠."

조제

*영화 내용에 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는 3월 13일에 한국에서도 개봉될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배우 겸 감독인 사라 폴리의 장편 다큐멘터리다. 사실 영화가 들려주는 건 이웃들에게 굳이 떠들고 싶지는 않을 법한 가족의 비밀이다. 고인이 된 어머니가 생전에 불륜을 맺었으며 그 결과 감독 자신을 낳게 됐다는 내용이니까. 이십대 후반에 생물학적인 아버지와 처음으로 대면한 사라 폴리는 이후 그와 꾸준히 교류해 왔고, 몇년을 망설인 끝에 자신을 길러준 아버지에게도 이 사실을 털어놓게 된다. 공교롭게도 공히 작가 경력이 있던 두 아버지는 각자의 시점에서 아내와 연인을 되새기는 회고록을 쓰고자 하는데 이를 계기로 폴리 역시 어머니의 초상을 다큐멘터리로 추적할 결심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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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아서 장담은 못하겠지만 내가 더 좋아할 만한 건 두 아버지의 책보다는 폴리의 영화일 듯하다. 미국판 <인터뷰> 매거진 2013년 5월호에 실린 케이티 홈즈와의 대화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와 제 가족의 사연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어요. '정말 근사한 영화 소재인데?' 하지만 그건 제가 이미 본 영화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잖아요? 한 사람이 자신의 생부가 따로 있다는 걸 알게되고 그래서 그들은... (중략) 제 가족의 사연이 영화적 소재로서 흥미롭다고 느끼게 된 건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였어요.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는 가족사는 저나 식구들이 기억하는 과거와는 아예 다른 것이죠." 사라 폴리는 두 명의 아버지, 자신의 형제 자매, 어머니의 친구들이 회상하는 내용을 뒤섞어 놓는데 당연히 그 이야기들은 종종 어긋난다. 그리고 그 조각의 합인 다이앤(폴리의 어머니)은 한 마디로 정리되거나 파악할 수 없는 매력적인 모순이다. 그녀는 쾌활하면서 우울하고 개방적이지만 비밀스럽고 헌신적이되 분방한 여성인 것이다. 모두가 다이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가운데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사라 폴리는 생전의 어머니를 기록한 슈퍼8 필름 사이사이에 배우의 재연 연기를 슬그머니 끼워넣는다. 영화의 논리 안에서 이 아슬아슬한 모험은 타당한 근거를 얻는다.

영화적인 실험을 끼얹은 통속극 정도에 그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좀 더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가는 작품이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사라 폴리는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객관적일 수 있는 관찰자다. 내밀한 가족사를 다큐멘터리로 만들 때 적지 않은 감독들이 감상에 젖곤 하지만 폴리의 태도나 화법은 꽤나 터프하다. 가차 없이 민감한 이슈를 파헤치고 애틋한 고백 끝에 과감한 유머를 덧붙인다. 예를 들어 길러준 아버지에게 생부의 존재를 밝히는 장면은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끌어낼 만한 대목이지만 감독은 보이스오버와 과장된 음악으로 이 장면을 농담처럼 만들어버린다. 더욱 인상적인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의 뭉클함이 무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28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감정의 앙금이 많이 정리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은 다이앤이라는 인물을 최대한 공정하게 평가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그녀를 아내와 어머니로서 용서한다기 보다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싶어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담담한 감동을 준다. 돌이켜보면 사라 폴리의 극영화들 역시 불륜에 관한 이야기처럼 시작해서 배신과 상처와 용서가 더 이상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작품들이었다.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어웨이 프롬 허>와 <우리도 사랑일까>가 보여줬던 넓고도 깊은 시선의 기원을 밝히는 다큐멘터리다. 폴리의 아버지는 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어떤 면에서는 네 어머니와 그 사람에게 감사할 일이다. 내 친딸이었다면 너처럼 훌륭한 아이는 아니었을 거야." 사람은 죽고 잊혀지고 남들의 추억 속에서 힘없이 왜곡되는 존재지만 때로는 중요한 영향과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미신같은 기억과 달리 그것은 눈 앞에 분명히 살아있는 실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