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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11일 10시 38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5월 11일 14시 12분 KST

표현의 자유와 공존의 예절

샤를리 엡도에 대해 선량한 이들이 격려와 연대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이미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많이 달라졌다. 이제 풍자 만화가들은 신과 선지자를 묘사하기 전에 한 번 더 머뭇거릴 것이다. 이런 머뭇거림이야말로 냉혈하게 동료 시민을 쏴 죽였던 테러리스트가 애초에 노렸던 효과이다. 이에 못지않게 염려스러운 일은 이 사건을 계기로 테러를 예방하기 위해 위협적 메시지에 대한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는 일이다. 잠재적 테러의 기운을 감지하기 위해 인터넷 게시물을 모니터하고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를 분류하기 위해 개인정보를 뒤져야 한다는 강박적 검열주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Gettyimageskorea

이 만화가 웃기는가?

풍자가 죽이는 세상이다. 샤를리 엡도의 만화가 웃기는지 아닌지를 놓고 웃을 수 없는 논쟁이 진행 중이다. 논쟁 끝에 조롱과 저주가 이어지고 훼손된 명예와 타락한 문화적 정체성이 등장한다. 논쟁은 위협과 다짐이 되어 삶과 죽음을 가르는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제 누구도 풍자 만화를 천진하게 보기 어렵게 되었다. 만화를 보다가도 무서운 얼굴로 돌아보며 묻는다. 이 만화가 정말 웃기냐고.

샤를리 엡도를 접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만화의 소재를 소개하면 이렇다. 종교와 관련해서 선지자의 아랫도리, 교황과 창녀 (함께 등장), 독생자의 성욕이 등장한다. 르펭을 비롯한 우익 정치인들도 갖가지 기묘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유명인이나 문화 권력자도 단골이다. 요컨대 BBC나 뉴욕타임스라면 절대로 화면이나 지면에 담지 않을 내용이다. 주제는 더 강력하다. 만화를 직접 보여줄 수 없으므로 엑프라시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하더라도 그 기괴한 함축적 의미를 온전히 전달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만화가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하느냐고 묻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부질없는 짓이다. 이 질문이 진정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웃긴데, 이런 자유에 대한 의심과 조롱마저도 인정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기본 교의이기 때문이다. 특히 만화가 풍자하려는 대상이 권력자라면, 그 권력이 정치, 종교, 문화 등 어느 영역에 속하더라도 표현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문명한 사회의 자유주의이다. 그러나 문명한 사회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때로 공존의 예절과 충돌한다. 이 충돌을 해결하는 방식이 한 사회의 품격을 드러낸다.

풍자적 소통의 효과

샤를리 엡도가 사회정치적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강력한 소통적 효과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만화의 풍자적 의도에 대한 이해 여부가 소통의 성공과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작가의 의도, 독자의 이해, 표현물이 유발하는 효과가 각각 별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로 말하자면 샤를리 엡도에는 분명 웃기지도 않는 만화가 있다고 말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본 만화의 의도, 즉 풍자적 요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웃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그 만화는 나에게 분명한 인상을 남겼다. 반대로 만화를 보고 폭소를 터뜨린 이들이 전부 종교적 권위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권력을 조롱하려는 샤를리 엡도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해의 내용과 별도로 소통이 성공할 수 있다.

샤를리 엡도의 만화를 남다르게 경험하는 이들이 있다. 만화가 묘사한 대상이 선지자, 교황, 성처녀 등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심각한 고통과 분노를 느끼는 자들이다. 그들이 만화의 풍자적 의도를 이해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이건 상관없다. 만화의 존재 자체가 그가 속한 집단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공격이라고 간주한다. 이 만화가 존재하여 유통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정신적 고통의 원인일 것이다. 내가 그들과 같은 정도로 고통을 느낀다고는 말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공감할 수 있다.

공감과 공존의 예절

샤를리 엡도의 풍자와 그에 대한 폭력적 반응 모두 남의 일이 아니다. 샤를리 엡도는 볼테르와 몰리에르의 위대한 풍자적 전통을 따르고 프랑스 좌파의 발칙한 도발정신을 담은 것이기에 우리의 맥락과 다르다는 설명이 있다. 또한 현대 프랑스의 제국주의 경험과 다인종주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샤를리 엡도를 둘러싼 사정은 우리와 다르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마치 우리나라 인터넷 게시판이나 토론방에 게시되는 풍자와 욕설, 그림과 합성사진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듯 말이다. 내용은 다를지언정 우리나라 인터넷 게시물 표현의 정치성과 역사성이 프랑스의 만화보다 덜 복잡하고, 뉘앙스가 제한되고, 정치적으로 얌전하다고 볼 수 없다.

1월 27일 한 성인 남자가 단원고 학생복을 입고 어묵을 먹는 사진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며 '친구 먹었다'는 제목을 달았다. 게시물은 인터넷에 빠르게 퍼졌으며 언론도 보도했다. 나로서는 게시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도 없지만, 게시자는 교복을 준비하기 전부터 분명 누군가를 웃기겠다고 의도했으리라. 실제 해당 게시물을 보고 진심으로 웃은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곁에 이런 끔찍한 조롱의 의도를 전하겠다는 자들이 있다. 그것을 즐긴 자들도 있다. 이 요점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종류의 인터넷 게시물을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표현의 자유의 경계를 작심하고 시험하려는 듯한 표현물이 있으며, 그로 인해서 불쾌함을 느끼는 자가 있고, 고통 받는 자들이 있다.

이런 고통과 공감이 그것을 유발한 표현물에 반대할 명분이 될까? 당연히 된다. 반대가 또 다른 표현이며, 언론이며, 담론적 구성물이면 그렇다. 그러나 해당 표현물에 대한 폭력적 응징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개별적 응징이 아닌 국가의 법적 개입은 어떠한가? 만약 이 고통과 공감을 겪는 이가 한 사회에서 일정 수준 이하이거나 이상이면 폭력적 응징의 정당성 또는 국가 개입의 필요성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는가? 아니면 고통 받는 자가 사회적 소수이거나 역사적 약자라면 판단이 달라지는가? 샤를리 엡도와 어묵 사태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표현의 자유의 한계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일 수 없다. 과거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절대적인 적이 없었으며, 문명한 자유 민주주의 사회도 마찬가지다. 표현의 자유가 폭넓게 보장된다고 알려진 미국을 보더라도 음란물, 명예훼손, 위증, 기만광고 등 표현물을 공표하면 법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정치적이거나 공익과 관련된 표현물은 상대적으로 폭넓은 자유를 누리지만 그 경우라도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되면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종교에 대한 표현물은 어떤가? 특히 그것이 웃기려는 농담이라면, 정치적 함의를 갖는 풍자라면 어떠한가?

농담과 풍자라는 범주 자체가 애매하며 그것의 소통적 효과도 그렇기 때문에 헷갈릴 것 같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누군가에 대한 풍자가 다른 이에게 모욕이 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다음 두 주장을 검토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 이는 명료하게 요점을 향하고 있으며, 또한 그 함의도 크다. 나는 한 사회가 이 두 주장을 수용할 수 있는지 여부가 그 사회의 자유의 한계를 결정한다고 본다. 또한 공존 예절의 품격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표현물로 인한 정신적 고통과 불쾌감의 정도가 폭력적 응징을 정당화 할 도리가 없다. 우려스럽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약간 다르게 생각했던 것 같다. 샤를리 엡도 사태를 염두에 두고 그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모욕할 수 없다"고 말하며 "친구가 내 어머니를 욕하면 맞을 것을 예상해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교황의 말대로 누구라도 어머니가 욕을 본다면 "당연히" 분노하겠지만, 그가 분노 끝에 주먹을 휘둘러 상대를 때렸다면 고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욕을 듣고 폭력을 행사한 후 고발당하는 것이 일상적인 사회인지, 같이 욕하며 대응하는 것이 보통인지, 아니면 경멸감을 느끼며 돌아서는 이가 많은지가 그 사회의 공존의 품격을 반영한다. 어머니, 아버지, 종교에 대한 조롱과 모욕에 대해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을 용인하는 사회를 건강한 사회라 어려울 것 같다.

여기에서 모욕을 유발한 표현물이 농담인지 아닌지가 별로 상관이 없게 된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그 표현물이 실제로 웃기는지 여부도 관련이 없다. 심지어 모욕감과 불쾌감을 비롯한 정신적 고통을 공감하는 이가 주변에 많다는 사실도 무관하다. 나로 말하자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어머니와 그의 종교를 욕되게 하는 이에 대해 함께 분노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때려도 된다고 생각해도 좋은 이유를 찾지는 못하겠다. 교황이든 누구든 욕을 듣고 상대편 어머니를 욕하는 것으로 응수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욕을 당하는 자가 아니라 욕하는 자가 무례하고 무신경하며 비열하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는 한, 애초에 왜 욕으로 대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둘째, 고통과 불쾌감을 근거로 국가가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제한 조건이 필요하다. 표현물로 인한 고통과 불쾌감이 한 사회의 공인된 역사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그 사회의 민주적 참여와 대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정도로 심각하면 그렇다고 본다. 요컨대 고통의 정도나 종류가 아니라 그것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이 규제를 정당화한다. 예컨대, 한 사회 내의 약자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며, 이 경우 약자의 발언이란 고통을 표현하고 억압적 사태를 바꾸어야 한다는 저항적 주장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저항적 발언을 규제하는 일은 민주적 참여를 제한하는 일이며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를 정당화할 방법이 없다고 본다.

유대인 대량 학살과 같은 심각한 범죄를 반성하는 나라를 생각해 보자. 이런 나라에서 소수자에 대한 학살의 역사를 부정하고 새로운 종류의 폭력을 조장하는 일은 불법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유대인을 비롯한 소수자가 느끼는 고통 때문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부정하고 새로운 폭력을 조장하는 일은 분명 유대인을 비롯한 소수자에게 심각한 고통을 유발하겠지만 그보다 그런 고통을 정당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과거를 반성하고 새롭게 나라를 구성한 원리를 채택한 국민의 의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 된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의지에 기초한 헌법적 가치의 부정을 용인할 수 없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기록된 3.1운동과 4.19혁명을 농담이든 뭐든 조롱하고 비난하면 괴로워 할 이들이 많다. 내가 그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나의 심오한 고통 때문에 표현물을 규제하자고 주장할 수 없겠다. 독립투쟁과 민주혁명의 이념을 따라 헌법을 채택한 국민의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독립과 민주적 참여의지를 꺾는 효과가 현실적이라면 규제를 주장할 수 있다. 요컨대 표현물에 대한 규제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헙법적 가치의 실현을 심각하게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때 정당화될 수 있다.

자유의 위축

나는 샤를리 엡도 사태를 놓고 평자와 논객들이 이리저리 논쟁하는 것이 반갑다. 이런 논쟁을 통해 표현의 자유와 공존의 예절에 대한 인식을 확대하고 감성을 가다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런 논란이 불안한 시대적 정조를 반영하는 것을 넘어 억압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 같아 염려스럽기도 하다. 샤를리 엡도에 대해 선량한 이들이 격려와 연대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이미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많이 달라졌다. 이제 풍자 만화가들은 신과 선지자를 묘사하기 전에 한 번 더 머뭇거릴 것이다. 이런 머뭇거림이야말로 냉혈하게 동료 시민을 쏴 죽였던 테러리스트가 애초에 노렸던 효과이다.

이에 못지않게 염려스러운 일은 이 사건을 계기로 테러를 예방하기 위해 위협적 메시지에 대한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는 일이다. 잠재적 테러의 기운을 감지하기 위해 인터넷 게시물을 모니터하고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를 분류하기 위해 개인정보를 뒤져야 한다는 강박적 검열주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이렇게 감시와 검열이 강화되어 자유로운 소통이 위축되는 현실 또한 냉혈한 테러리스트가 애초에 염두에 둔 일일지 모른다.

*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신문과 방송> 3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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