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5년 11월 23일 09시 55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23일 14시 12분 KST

'선거의 여왕'에서 '기술의 여왕'으로

'선거의 여왕'은 박근혜 대통령의 별명이다. 박 대통령이 이 별명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부디 부끄럽거나 불쾌하게 여기면 좋겠다. 선거와 정치적 싸움에 능한 것은 국민행복에 별 도움이 안 될뿐더러 역사에 남을 업적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대학 전공에 걸맞게 '기술의 여왕'으로 다시 태어나면 안 될까? 그런 의미에서 최근 서울대 공대 교수 26명이 출간한 <축적의 시간>이라는 책의 일독을 꼭 권하고 싶다.

'선거의 여왕'은 박근혜 대통령의 별명이다. 박 대통령이 이 별명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부디 부끄럽거나 불쾌하게 여기면 좋겠다. 선거와 정치적 싸움에 능한 것은 국민행복에 별 도움이 안 될뿐더러 역사에 남을 업적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대학 전공에 걸맞게 '기술의 여왕'으로 다시 태어나면 안 될까? 그런 의미에서 최근 서울대 공대 교수 26명이 출간한 <축적의 시간>이라는 책의 일독을 꼭 권하고 싶다. 공학자들의 이야기로 구성된 딱딱한 책이지만, 한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더할 나위 없이 흥미진진하고 유익한 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2015-11-23-1448258026-3590934-580310340300453166001.jpg

최근 70대 노부부가 구멍가게와 빵집배달 등 갖은 고생을 하면서 평생에 걸쳐 모은 전 재산 75억원을 카이스트에 기부한 감동적인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가? 노부부가 국가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으로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택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지금 이대론 안 된다는 우회적 호소는 아닐까?

한국 경제 위기의 징후들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축적의 시간>은 우리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요인들을 실감나게 고발하고 있다. 읽는 이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그런 장애요인들은 해결할 수 있는 것임에도 해결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각자도생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연구개발(R&D) 예산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그게 웬말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시늉이 아니라 실속이다. 정책관계자에게 뭘 하는 게 좋다고 이야기해도 "미국·일본·유럽이 안 하는데 왜 한국이 해야 하느냐. 벤치마킹할 대상이 없으니 안 된다"고 거절하더라는 증언이 그런 실상을 잘 말해준다. 일반 산업체에도 우수한 연구개발인력이 아주 많은 선진국과는 달리, 한국은 고급 과학기술인력의 83%가 대학과 정부 출연 연구소에 몰려 있기 때문에 선진국과 같은 방식으로 국가 연구개발 정책을 운영해서는 안 됨에도 이런 특수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선진국의 유행을 추종하느라 한국 시장이나 산업 현장과는 동떨어진 연구를 하는 비중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교수의 채용과 승진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논문도 그런 흐름에 종속돼 기술 실용화를 외면하면서 산학협력을 빈껍데기로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 산업을 이끌 만한 새로운 것을 개발해서 세계적인 특허를 냈다 하더라도, 논문이 없으면 현재 우리 기준으로는 임용하기 어렵다"고 하니 과연 무엇을 위한 공대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최고의 인재들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었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나갔고 3대 서비스업(의료, 금융, 법률)이 이공계 핵심 인재를 빼감으로써 국가적 차원에서의 인적자원 활용을 왜곡시키는 심대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똑똑한 인력이 몰려드는 의대와 대학병원은 연구개발을 수행할 환경이 전혀 안 돼 있고, 그 최고급 인력은 창의적이지 않은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들을 설득력 있게 지적한 <축적의 시간>은 "기술자를 우대한 국가가 산업사회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상식을 재확인시키면서 우리 사회 전반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현실에서 서울대 공대는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 위주로 산업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의해 평가받아야 한다는 등의 제언도 인상적이다. 전국에 걸쳐 각 지역의 공대들이 지역 실정에 맞게끔 이런 책을 내는 건 어떨까?

기술 축적을 하는 데 관심이 없고, 기술은 아웃소싱하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등 "기술의 가치를 이해하는 경영자가 없다"는 지적은 정부와 정치권의 경우엔 더 말해 무엇하겠느냐는 비관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기술의 여왕'이 적극 나선다면 달라질 수도 있는 문제 아닌가. 부디 박 대통령의 국가적 의제 인식에서 과학기술이 최상위로 뛰어오르는 변화가 있길 기대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