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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2월 09일 06시 37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4월 11일 14시 12분 KST

꿈의 독재

한때 좋은 덕담이었던 "꿈을 가져라"라는 말이 이젠 노골적인 냉소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도 "꿈을 가져라"라는 말의 변형일 텐데, 이 말을 제목으로 내건 책의 운명도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 2010년에 나온 이 책은 300만부 이상 나갈 정도로 독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는데, 이젠 이 책에 대해 비판적인 글이 어찌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지 일일이 세기조차 힘들 정도다.

한겨레

한때 좋은 덕담이었던 "꿈을 가져라"라는 말이 이젠 노골적인 냉소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도 "꿈을 가져라"라는 말의 변형일 텐데, 이 말을 제목으로 내건 책의 운명도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 2010년에 나온 이 책은 300만부 이상 나갈 정도로 독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는데, 이젠 이 책에 대해 비판적인 글이 어찌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지 일일이 세기조차 힘들 정도다.

내가 보기에 그 책은 어떤 사람들에겐, 즉 꿈을 가져도 좋을 사람들에겐 여전히 좋은 책이다. 다만 문제는 3만부 정도 나가면 적당할 책이 300만부나 나가는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는 것일 텐데, 단지 책이 많이 팔렸다는 이유만으로 그 저자를 비판하는 게 공정할까? 무엇이 좀 좋다 싶으면 우우 몰려다니는 우리 사회의 '쏠림' 현상을 문제삼는 게 옳지 않을까?

지난 몇년간 극도로 악화되었고 앞으로 더욱 악화될 것으로 전망되는 취업난은 꿈을 기만과 모욕의 단어로 전락시키고 있다. "3차 대전은 일자리 전쟁이 될 것이다"라는 경고가 실감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적절히 대응하고 있는가? "꿈을 가져라"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분노의 삿대질을 한다지만 여전히 꿈은 간직하면서 꿈을 이룰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울화통을 그렇게 표현하는 건 아닌가?

우리는 '아메리칸드림'의 허구성을 비웃곤 하지만, '코리안드림'에 대해선 여전히 강고한 신앙을 갖고 있다. 전 국민의 85%가 "나는 신분이 상승할 것"이라고 믿고 있을 정도로 한국인의 상향 이동성에 대한 믿음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이런 믿음이 한국의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룬 원동력인 건 분명하지만,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저성장과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엔 피할 수도 있는 고통의 근원이 될 수 있다.

그간 한국을 지배해온 경제 이데올로기는 이른바 '낙수 효과'였다. 대기업이나 중앙을 우선 지원하여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 그 혜택이 중소기업·소비자나 지방에 돌아간다는 논리가 '광복 70년'을 이끌어온 것이다. 그 덕을 본 점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문제는 달라진 세상이다. 그 이데올로기의 원조 국가들에서도 '낙수 효과'는 수명을 다했다며 새로운 진로를 모색한 지 오래인데,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성공 신화에 사로잡혀 이미 비대할 대로 비대해진 재벌과 중앙의 덩치를 키우는 짓을 계속하고 있다.

경제적 '낙수 효과'를 비판하는 사람들 역시 개혁 방법론에서 '위에서 아래로'라거나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라는 '낙수 효과'의 원칙에 충실하다. 노동운동에 대한 응원도 대기업 노조 중심이며, 사회 진보를 평생 과업으로 삼겠다는 사람들도 서울이나 서울 근처에서 살아야만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목표는 어떤가. 이는 7년째 공고화된 '비정규직 800만명대'라고 하는 현실에선 아름다운 꿈이 될 수밖에 없다. 그 꿈을 추구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꿈과 현실을 구분하여 현실에 걸맞은 대안 모색도 병행해야 하는 게 아닌가? 즉 비정규직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조건으로 먹고살 수 있게끔 하는 길을 찾아야 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 고민을 하는 건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목표를 흔들 수 있기 때문에 외면해야 한다면, 이는 '꿈의 독재'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리의 꿈이 서 있는 토대는 승자 독식 체제다. 모두 승자가 될 수 있는 꿈을 지향하면서 '승자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먹고살게만 해달라'는 외침엔 '기다리라'는 답만 해줄 뿐이다. 정규직의 고용안정성과 비정규직의 고임금을 양자택일할 수 있게 한다면, 장그래도 정규직이 되고 싶다고 절규하진 않았을 것이다. 장그래의 아픔에 공감했던 우리는 그가 정규직이 되길 응원했을 뿐, 다른 수많은 장그래들의 처지에 대해선 눈을 감은 게 아닐까? 우리는 작게나마 나눠 먹는 꿈을 꾸기보다는 고용안정성과 고임금을 동시에 누리는 승자독식을 꿈으로 삼으면서, 그걸 개혁이요 진보라고 주장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