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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03일 09시 07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2월 02일 14시 12분 KST

싱글의 냉장고

내가 알던 것보다 세상은 훨씬 더 무서웠고, 여자 혼자 산다는 건 늘 불안과 함께 잠드는 일이었으며, 타인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은 그가 아무리 가까운 친구든간에 아주 아주 적었다. 강제 입소당한 '싱글라이프 부트 캠프'가 남긴 것은 '모든 것은 너 혼자 알아서 해야 한다.'라는 잔인한 교훈이었다. 그런데 나 혼자 알아서 할 수가 없는 일이 딱 하나 있다는 걸 동시에 깨달았으니 그건 바로 요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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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의 연애가 끝났다. 그러고나자 진짜 싱글 하우스가 되었다. 혼자 산다는 건 생각보다 아주 많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지난 몇 개월동안 꽤나 처절하게 경험했다. 특히 첫 4개월이 그랬다. 누군가가 "싱글라이프 부트캠프(boot camp, 신병훈련소)를 보내주지, 이 코스를 마치면 어느새 너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는 베테랑 싱글이 되어 있을 게야." 라며 나를 싱글 부트 캠프에 입소시킨 게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저 속성 코스가 날 위해 준비한 몇 가지 사건을 말해볼까. 다시 생각해봐도 우연이라기엔 꽤나 잘 짜여진 코스 같으니 주변에 이 싱글부트캠프가 필요한 친구에게 정성껏 꾸며주어도 좋겠다. 그 시작은 대낮에 아무리 생각해봐도 의심스러운 남자가 집 앞까지 따라온 일이었다. 그 후로 새벽녘 누군가가 우리집 담을 넘어 들어와 수첩과 배터리 충전기, 안경 같은 소지품을 잔뜩 흘리고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라졌으며, 여행을 다녀왔더니 분명 닫고 나간 창문이 열려있었다. 그리고 끝판왕으로 아픈 배를 움켜잡고 허리를 반쯤 접은 채 콜택시를 불러 종합병원 응급실을 다녀왔던 것까지. 내가 알던 것보다 세상은 훨씬 더 무서웠고, 여자 혼자 산다는 건 늘 불안과 함께 잠드는 일이었으며, 타인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은 그가 아무리 가까운 친구든간에 아주 아주 적었다. 강제 입소당한 '싱글라이프 부트 캠프'가 남긴 것은 '모든 것은 너 혼자 알아서 해야 한다.' 라는 잔인한 교훈이었다.

그런데 나 혼자 알아서 할 수가 없는 일이 딱 하나 있다는 걸 동시에 깨달았으니 그건 바로 요리였다. 음식이 남아돌기 시작했다. 요리가 일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취미가 장 보기인 나에게 이건 취미생활을 강제 금지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버려지는 음식과 냉장고 속에 방치되는 음식과 어쩌다가 눈에 띄여 냉동고로 이동해 아주 조금 생이 연장된 (혹은 영원히 나올 수 없는 냉동감옥행이 된) 음식재료들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이자 결국 장 보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렌지 위에 올려둔 먹고 남은 찌개는 지금이 기회라는 듯이 금방도 상했다. 치밀한 부트 캠프 기획자 같으니. 뭔가를 해먹겠다며 장을 볼 때마다 아니 그냥 사 먹는 게 낫지 않나라고 무거운 장바구니를 옮기며 중얼거리게 되었다. 나 혼자도 저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사람 수가 반으로 줄었는데 싱크대에 쌓이는 설거지 거리와 부엌일은 전혀 줄지 않는 것도 미스터리였다. 어쨌든 전혀 효율이 좋지 않은 '짓거리' 였다. 싱글에게 집밥과 요리라는 것은.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꽃게가 그렇다. 올 꽃게철, 하우스메이트가 있었다면 꽃게탕을 해 먹었을 거다. 알이 밴 암컷 꽃게가 제철이었던 봄, 나는 시장과 마트에 갈 때마다 꽃게들의 배를 쓰다듬으며 '널 한 마리만 사다가 탕을 끓여 먹으면 너도나도 아주 외롭겠지? 그래, 안녕. 부디 싱글하우스가 아닌 러브하우스에 가서, 친구들과 한 냄비에 알콩달콩 끓어올라 한 가족을 즐겁게 해주렴'이라고 정신병자처럼 생각하기를 여러 번이다. 그래, 까짓 거 해 먹을 순 있다. 혼자 한 상 차려 먹는 건 사실 내 취미니까. 하지만 왠지 꽃게탕은 그렇게 먹기엔 처량한 메뉴다. 혼자 화려한 한 상을 차려먹고 싶다면 메뉴 선택을 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신나게 먹다가 음식이 1/3 정도 남은 지점에서 '지금 나 혼자 뭐 하는 거람?' 이란 생각을 하며 씁쓸해지고 말 것이라는 걸 미리 경고한다.

꽃게탕과 유사 재료들을 독하게 외면하는 몇 번의 쇼핑 후 나는 결단을 내렸다. 냉장고를 작은 걸로 바꾸기로 했다. 원래 쓰던 냉장고는 꽤 오래 전에 생각없이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입한 커다란 미제 양문형 냉장고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집 높은 전기세의 주범이 아닐까 6년째 심증만 가지고 있는 110v 짜리 냉장고다. 내게 큰 냉장고는 뭐랄까, 장보기의 죄책감과 고민을 줄여주는 마음의 도피처 같은 것이었다. 오늘 가지가 진짜 싸네, 다섯개 묶음을 사야하지만 뭐 냉장고에 넣어놓으면 되지. 하지만 가지는 첫날 내 뱃속으로 들어간 두 개만 빼고 결국 채소칸 구석에서 말라비틀어지고, 냉장고 속은 점점 비좁아지고, 결국 노란 음식물 쓰레기 봉투만 차오르는 게 되는 것이었다.

10년 쓴 냉장고가 고장 나기 직전인 친구에게 내 멀쩡한 냉장고를 팔기로 하고 청소를 시작했다. 냉장고 안은 마치 나의 허영과 탐욕과 지나친 자기애의 무덤같았다. 똑같은 딸기쨈이 브랜드별로 다섯 병 발견되었다. 유효기간이 지난 소스들은 몇 병인지 세어보지도 않았다. 소스며 향신료, 병조림들의 국적을 따져보니 세계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냉동고 속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않기로 하자. 지난 몇 달간 열어보지 않은 병들은 모두 버렸다. 냉장고 한 칸을 모두 채우고 있던 1년된 김장 김치는 동네의 친한 외국인 친구들 몇 명에게 나눠주었다. 김치찌개와 김치볶음밥, 김치전을 만드는 법에 대한 요리 클래스를 함께 곁들여서. 다들 어디서 들은 건 많아서 오래된 김치라고 하자 내가 뒷마당의 장독대를 열어 귀한 묵은지를 나눠준 양 너무 고마워하는 바람에 나도 몸둘바를 몰랐다.

그리고 내 냉장고는 730 리터에서 330리터가 되었다. 이쯤에서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은 아마도 이런 결말를 기대하고 있을테다. "냉장고가 작아지자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 작아진 냉장고만큼 장을 계획적으로, 또 적게 보고 알뜰하게 먹는 방법을 배웠으며 음식물쓰레기도, 낭비되는 음식도 적어졌고 나는 그만큼 건강한 싱글의 식생활을 드디어 영위해내었다. 어쩌면 아예 냉장고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경단체의 팜플렛에 실릴 것 같은 결말이다.

하지만 나의 '냉장고 줄이기' 가 어떻게 끝날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냉장고를 없앨 생각 따위도 하지 않는다. 뭔가 대단한 생활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집 사이즈에, 내 생활의 사이즈에 맞는 작은 냉장고를 부엌에 두었다는 사실만으로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먹다 남은 꽁치김치찌개를 냄비째 넣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겠지만, 대신 딸기쨈을 브랜드별로 사 모을 일은 없을 것이고, 세일이라는 이유로 5개짜리 가지 묶음을 호방하게 사는 대신 제일 좋아 뵈는 가지를 딱 하나만 사 오게 될 테니까. 그리하여 내 음식물 쓰레기 봉투는 예전보다 덜 차오를 테니까.

* 이 글은 코스모폴리탄 4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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