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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1월 28일 06시 16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1월 28일 14시 12분 KST

민주적 유권자의 '소명'

연합뉴스

"투표는 브로콜리 같아요. 몸에 좋다고 자꾸 먹으라고 하는데,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 학회에 갔다가 동료 학자 조주은 교수에게 전해들은 말이다. 학생들에게 투표에 대해 얘기해보자 했더니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투표의 효능감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잘 보여주는 말이다. 이 말은 '헬조선'이 곧장 '탈조선'과 연결되는 이유도 보여준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의지가 "갈아봤자 뭐하나" 하는 실망감에 직면해 "못 살겠다, 떠나보자"로 귀결된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민도 가고, '워홀러'도 시도하고 있다. 그럴 수 없는 노인들 가운데는 '탈조선'의 방편으로 자살을 택하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니 유행하는 "백세인생"은 최소한 은수저는 되는 노인들에게나 들어맞는 노래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이래 수구·보수 세력이 87년 이후 민주화 성과를 파괴해온 상황을 생각해보라. 남북관계와 외교는 엉망이고, 국가기구에서 시민사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역에서 탈민주화가 진행되었다. 남아 있는 민주화 성과는 선거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상황을 요약하면, 기득권을 모두 챙긴 수구·보수 세력은 선거에만 이기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반면, 돈도 권력도 없는 다수 대중은 선거에 지면 모든 것을 잃는 형국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그 선거가 가장 중요한 고지이고 전체 형세를 바꿀 수 있는 요충지라는 점이다. 이 점은 선거 승리를 위해 진력을 다하는 여당과 수구·보수 세력의 모습이 거꾸로 증명해준다. 역시 그들은 브로콜리 맛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에 지면 모든 것을 잃을 대중이 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못 살겠음의 고통과 못 살게 만든 이들에 대한 분노는 넘쳐흐르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든 갈아치울 길을 찾아야 한다. 당연히 다가오는 총선 목표는 여당의 단독 과반 저지가 되어야 한다.

물론 야당의 분열로 인해 패배의식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기기 어려워 보이는 선거는 정치적 무관심을 불러들인다. 이왕 진 판이니 야당들끼리라도 제대로 겨뤄 국민의 선택을 받아보잔 주장도 설득력을 갖게 된다. 야당이 분열하면 지지층도 분열하게 되고, 정치인뿐 아니라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여당을 향해서보다 서로에 대해 더 험한 말을 쏟아놓게 된다. 하지만 지금 야권 지지자들은 정당 분열에 이끌려, 예컨대 문재인 편에 서서 안철수를 비난하거나 안철수 편에 서서 문재인을 비판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대신 오로지 여당의 단독 과반 저지를 위해 누가 진정성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행동하는지 꼼꼼히 따져야 한다. 야당들이 혁신 경쟁을 저버리고 어서 연합에 나서야 한단 말이 아니다. 경쟁도 대의 아래 수행되어야 마땅하니 야권 지지자들이 매서운 눈으로 그 점을 주시해야 한단 것이다.

지난 세기 초 패전 독일 청년들에게 했던 강연에서 막스 베버는 정치가가 가져야 할 품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자기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자기 눈에는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정치상황에서 이 말은 이렇게 고쳐 말해져야 할 것 같다. "정치인들이, 자기 눈에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민주적 시민으로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