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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1일 07시 16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2월 31일 14시 12분 KST

혐오가 아니라 분노를

gettyimagesbank

올 한 해 우리 사회의 일반적 감정을 꼽아 보라면 혐오를 택할 사람이 꽤 있을 것 같다. 물론 혐오가 딱히 올해만의 현상은 아니다. 그래도 지난 연말 우리는 "안녕들 하십니까"라며, 서로의 안부를 물을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올해는 그런 심리적 여유마저 사라진 듯하다. 종편은 늘 그랬듯이 북한을 혐오하고 조롱하며 한 해를 보냈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혐오는 점점 더 진해졌다. 여성, 호남, 민주당을 혐오의 연쇄로 묶던 '일베'의 활동은 몇몇 회원이 사법처리를 받긴 했지만 여전히 계속되었다. 소라넷을 둘러싼 논란은 여성 혐오가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경유하며 폭력적 '행위'와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둘 다 왜곡된 인정(認定) 시스템을 매개로 혐오와 공격성 표출을 부추기고 강화하는 회로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사례였다. 이런 흐름에 대응하기 위해 여성들은 남성의 여성 혐오를 혐오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이 '여혐혐'이라는 대응 전략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여성 혐오를 저지할 만큼 확장성 높은 전략인지는 확실치 않으며, 혐오에 대한 혐오도 일종의 혐오라는 사실은 유감스러운 것으로 남는다.

혐오의 감정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타자의 행위는 존중받을 만한 것이 못 되는 '질'로 격하되고, 타자는 인간의 이하의 '충'(蟲)으로 무시된다. 내 어린 시절 기억으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벌레라고 칭하는 것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있는 일이었고, "이런 버러지 같은 놈"이라는 표현은 늘 최악의 인간을 처단할 때나 부르짖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타자 그리고 특정한 인간 집단을 벌레로 명명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서울대 같은 내로라하는 대학의 학생들이 지역균형선발로 입학한 학우를 '지균충'이라고 부르는 반지성적인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으니, 홉스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 벌레인" 사회에 살게 된 셈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점점 더 촘촘하게 층화된 위계적 사회가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위/아래로 정리된다. 예전에도 나이와 "짬밥"이 '깡패짓'을 하지 않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갑을 연쇄의 촘촘함과 견고함이 어떤 문턱을 넘은 듯하다. 그렇게 되면 나와 동류 또는 동등한 인간, 즉 나 '같은' 인간이 줄어들고, 나보다 높거나 낮은 인간만 즐비해진다. 이렇게 자신과 동일시할 수 없는 타자가 느는 사회에서는 공감과 연민 또한 옅어진다. 그 대신 이질감, 경멸, 혐오가 들어서는데, 유감스럽게도 경멸은 경멸을 부르고 혐오는 혐오를 이끈다.

"갑을관계" 혹은 "갑을사회"보다 먼저 쓰인 "양극화"란 말엔 그래도 어떤 희망이 있었다. 거기엔 어떤 구조적 경계선에 대한 감각, 혐오되고 있는 대상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공감의 태도, 그리고 전체 사태를 조망하고 참을 수 없는 일에 분노하는 감정이 살아 있었다. 이에 비해 갑을사회에서 우리는 타자를 혐오하고 그에게 갑질을 하고 있는 바로 그때에만 비로소 자신이 경멸당하지 않고 있으며 을도 아니라는 안도감을 얻게 된다.

혐오가 만연해가는 사회에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어떤 공통감각(common sense), 상식이다. 즉 혐오가 전제하는 너와 다르다는 감각이 아니라 너와 같다는 감각이 필요하다. 이 공동성, 공통성, 평등, 동등의 감각으로부터 서로에 대한 존중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것을 파괴하거나 약화하는 것들을 용서하지도 허용하지도 않겠다는 태도와 의지로부터 분노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혐오를 혐오하기보다 혐오에 분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