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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05일 06시 22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05일 14시 12분 KST

대통령만큼의 결기가 필요하다

연합뉴스

"역사학자의 90%가 좌파다." "전체 책을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 "잘못된 역사교육으로 청년들 입에서 헬조선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박정희는 비밀독립군이었다 한다." "(국정화에) 반대하는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고등학교의 99.9%가 편향된 교과서를 선택했다." 대한민국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대통령, 총리, 여당 대표, 국회의원들이 한 소리들인데, 극도로 예의를 지켜 관찰자 시점에서 평가하면 전부 "개 풀 뜯는 소리"다.

그렇다. 관찰자 시점에서 보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은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 수렁에 빠져 들어간 형국이다. 불통이란 이미지가 더 강화되었고, 비밀 티에프(TF) 운영과 예비비 불법 집행으로 반칙을 일삼는 이미지도 덧씌워졌다. 이메일 의견제출 거부, 의견제출용 팩스 꺼놓기, 전자관보 게재를 보면 직전 대통령의 장기였던 '꼼수'도 떠오른다. 그렇게 해서 지지도가 떨어진 대통령이 겨우 진압한 여당에 자기 사람을 잔뜩 심고 총선 승리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더구나 선거구 조정으로 도시 지역 선거구가 늘어날 텐데 말이다.

하지만 국정화를 반대하는 참여자 시점에 서면, 대통령이 정치적 실수를 저질렀다고 쉽게 생각할 상황은 아닌 듯하다. 국정화를 강행하는 대통령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었고 어느 정도 결기로 임하는지 냉정하게 가늠해봐야 한다. 10월 마지막주 갤럽 조사에 따르면, 국정화 찬성은 36%, 반대는 49%라고 한다. 걱정스러운 점은 국정화 반대론자들 사이에 이런 여론조사 결과에 자족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명백히 1987년 민주화 이전으로 후퇴하려는 이런 시도에 대해 36%라는 찬성은 지나치게 높다. 더구나 반대하는 49%는 스펙트럼이 넓은 사회문화적 결속인 데 비해 찬성하는 36%는 응집력이 높은 정치적 결속이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여러 갈래의 상층 엘리트 집단을 결집하는 면도 있다. 생각해보라. 박 대통령이 굳이 이승만 대통령을 추숭할 이유는 없다. 4·19 혁명이 있어서 그랬지, 그렇지 않았다면 5·16 쿠데타가 거꾸러뜨린 것은 이승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아버지의 무덤에 회칠을 하기 위해서 이승만 추종 집단과 제휴했다. 화제가 된 자유경제원 전희경 사무총장의 발언에서 보듯이 차제에 사회교과서 국정화를 원하는 재벌도 힘을 합치고 있다. 아마 그 사회교과서는 앵거스 디턴의 저서 번역본처럼 만들어질 것이다.

국정 한국사 교과서는 2017년부터 사용될 텐데, 그 점을 두고 어떤 국정화 반대론자는 "1년밖에 못 쓸 교과서를 시도하는 대통령의 정신 나간 행태"라고 꼬집는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정신 나간 면은 국사를 국정화한다는 데 있지 1년밖에 못 쓸 교과서에 집착하는 데 있진 않다. 1년밖에 못 쓸 교과서인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기 때문이다. 국정화 강행으로부터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통령의 의지는 다음 총선을 자신의 주도로 승리하고 자신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 후계자를 내세워 대선에 승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교육감 선거를 폐지하는 것이다.

관찰자 시점에서라면 대통령의 이런 의지와 계획이 좌초할 가능성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관찰자 시점에 설 때조차도, 많은 사람이 우리 사회가 '헬교과서'로 역진해 가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심지어 '보수' 언론과 교육부 장관조차 검정 강화로 족하다는 의견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불교에 따르면 '헬'에도 여러 단계가 있고, 역진은 그만큼 더 일어날 수 있다. 그러니 참여자 시점에서라면 더더욱 대통령의 결기를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적어도 그만큼의 결기를 가져야 하고 국정교과서를 1년밖에 못 쓰게 만들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