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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10일 06시 07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9월 10일 14시 12분 KST

"무뎌졌다" | 고현철 교수를 애도하며

연합뉴스

부산대 고현철 교수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일이다. 그새 유서를 여러 번 읽었는데 늘 먹먹하게 남는 단어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무뎌졌다"는 말이다. 그는 우리 모두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에 무뎌졌고, 그것에 저항하는 모습에도 무뎌졌다고 말한다. 그런 것 같다. 국정원이 정치의 전면에 나선 지가 오래다. 사람들 핸드폰과 컴퓨터로 헤집고 다닌단다. 그래도 "별일 없이 산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절규를 들어도 무뎌졌고, 고공농성을 200일 넘게 해도 "또 그러는구나" 했다. 공장 굴뚝에서 농성하는 노동자들에게 하루 100만원씩 벌금을 때리는 법원에 "굴뚝이 상하는 것도 아닌데 뭐 이런 판결이 다 있나" 하고 분노했지만 10분 뒤 일상으로 돌아갔다. 밀양에선 할머니들이 쇠줄을 목에 걸고 몇 년을 싸웠지만, <밀양을 살다> 한번 읽으며 가슴 저미고 끝났다. 배가 침몰해 수백명의 어린 학생들이 죽는 참사가 일어나니 겨우 몇 달 마음이 심하게 아렸다. 진상조사위원회 법안이 누더기가 되고 예산과 인력이 없어 활동을 못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혀를 끌끌 차지만, 그즈음 일주년 집회에 나가본 것이 다였다. 무뎌진 것이다. 그러고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판교에선 환풍구가 꺼졌고, 의정부에선 큰불이 났고, 메르스로 임종도 못하고 죽은 이가 수십명이고, 추자도에선 배가 또 뒤집어졌다. 다 인재지만, 정해진 회의에 들어가고 수업에 들어갔다.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 다 느끼고 살 수는 없어서 무뎌져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이러하니 살처분한 수백만 동물이며 녹조 가득한 강물까지 깊이 신경쓰긴 너무 어려웠다.

이렇게 무뎌진 세상에서 조용히 푹푹 썩고 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대학이다. 교육부가 대학을 처음 주물럭거릴 땐, 대학도 문제가 많으니 바뀌어야 하고 스스로 바꾸는 게 한참 더디니 교육부가 나선 것이 일면 이해가 갔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돈으로 대학을 조리돌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사코 총장 직선제를 없애려 하고 간선제로 뽑아줘도 원하는 사람이 아니면 임용을 거부하는 걸 보면서 저의마저 의심스러워졌다. 하지만 많이 얻어맞다 보니 대학은 '매 맞는 아내'처럼 무뎌졌다. 그 무뎌짐에서 대학을 깨우려 고현철 교수는 몸을 던졌다. 생각해보면 해방 후 70년 동안 숱한 일들이 있었지만 교수가 투신한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그 처음이라는 놀라움조차 대학 밖으로는 그리 큰 파문을 던지진 못하는 듯하다. 대학이 바깥의 힘겨움에 그만큼 무뎠던 탓일까?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무뎌져 가고 있는 것일까?

그래도 아프게 느껴져 다시 말하고 싶은 일은 이런 것이다. 고현철 교수의 부고를 접한 그날 신문에서 교육부 장관 전 보좌관이 석연찮은 학력으로도 교수에 임용되고 그즈음 비리로 물러났던 그 대학 총장이 이사장으로 복귀했다는 기사를 읽는 건 참혹한 일이었다. 최근 강원대는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D등급을 받고 총장이 물러났다. 하지만 교육부 차관 출신이 총장으로 간 두 대학은 올해 가볍게 재정지원 제한에서 벗어났다. 이건 다 오이밭에서 신발끈 고쳐 맨 일에 불과한가? 그 가운데 한 대학은 한 해 만에 재정지원 제한에서 A등급으로 올라섰고, 다른 한 대학은 차관 출신 총장 취임 6개월 만에 '2014년 특성화 전문대학 육성사업'과 '세계로 프로젝트' 등 두 부문에서 우수대학으로 선정됐는데, 이런 것이 대한민국 차관들의 탁월함을 입증하는 것일 뿐인가? 이런 일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건 너무 예민한 것이니 무뎌져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무뎌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꾸 무뎌지는 것, 그러다가 아예 무뎌지는 것, 그것이 죽음 아닌가?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