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5년 08월 13일 14시 54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8월 13일 14시 12분 KST

치적 때문이라면 굳이 4대개혁을 안 해도

gettyimagesbank

사회과학 서적을 뒤적여본 사람이라면 '생산비용'이나 '거래비용' 같은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거기에 '지도자비용'(leader cost) 같은 용어를 추가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저런 사회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좋은 지도자가 나타나 해결해주었으면 하게 된다. 하지만 새로 지도자를 선출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러면 멍청한 동료 시민들이 잘못 선택해서 그렇지 제대로 뽑으면 그렇지 않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잦다 보면, 지도자란 단위 조직이 '결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한 해결책의 하나일 뿐, 정말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제시하고 우리를 이끌어가는 존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도자는 제도 수준에서 그 자리가 안배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출해야 하는 존재일 뿐인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리를 채운 존재는 무능, 사욕, 우유부단함 같은 온갖 인간적 약점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도자 선출은 그로 인한 비용 지출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해방 후 여러 대통령에 대해 세간의 농담은 운전에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 초보운전, 박정희 과속운전, 최규하 대리운전, 전두환 난폭운전, 노태우 졸음운전, 김영삼 음주운전, 김대중 안전운전, 노무현 모범운전, 이명박 역주행, 박근혜 무면허 운전." 노무현 대통령을 몹시 좋아한 사람이 만든 농담인 듯하고, 그래서 개인적 기준이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전혀 동의가 안 될 수 있다. 하지만 지도자가 어떤 의미에서 비용인지 드러내주는 면은 있는 농담이다.

지도자비용에 주목하게 되면, 지도자가 뭔가 하겠다는 것을 어쩌긴 어려워도 그걸 바라진 않게 된다. 지도자가 의욕을 내면 비용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재임 기간을 대표할 업적을 추구하면 그건 위기의 시작이고, 역사에 길이 남을 과업을 시도하는 건 재앙에 해당한다. 더불어 지도자의 공덕이 작위(commission)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부작위(omission)에 의해서 형성될 수 있음도 알게 된다.

며칠 전 박근혜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노동, 금융, 공공 부문, 교육 개혁을 내걸었다. 그동안에도 국가정보원이 일으킨 사건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로 괴롭고 어수선한 정부였지만, 이런 사건들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발원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마침내 대통령이 '창조경제'라는 몽롱한 말을 내던지고 치적을 쌓겠다고 나선 셈이니, 박근혜 정부의 진짜 위기는 이제 시작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레임덕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유승민 원내대표를 쫓아낸 항룡(亢龍)의 기세를 생각하면, 오리의 뒤뚱거림이 대통령의 우스꽝스런 모습이 아니라 온 나라가 휘청거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전임 이명박 대통령과 비교할 때, 박 대통령에게 치적이 없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면 4대 개혁에 덜 집착하지 않을까? 이명박 대통령은 사욕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내세울 만한 업적을 쌓으려 할 때는 사욕을 뒤로 물리는 법인데, 그가 치적으로 내세우는 4대강 사업이나 자원외교를 둘러싼 부패와 스캔들을 보면 그렇게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비록 가족사에 침윤되어 비뚤어졌을망정 공심(公心)이 높아, 돈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 것 같다. 본인이 그러하니 부패가 생긴다면 친지나 측근에서 생길 텐데, 지금으로선 그 부분도 서로 견제해서인지 대단치 않은 듯하다. 그러니 부작위를 통한 업적이 또렷한 셈이다. 이 업적만으로도 충분히 크니 4대 개혁으로 자신과 국민을 힘들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항룡유회(亢龍有悔)라고 하지 않는가.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