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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7월 09일 11시 46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9월 08일 14시 12분 KST

"당신도 인사 청문회에 설 수 있습니다"

청문회 무력화보다는 차라리 우리 사회 엘리트들에게 항상 자신들이 어떤 이상한 분의 수첩에 이름이 올라 인사청문회에 서게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방법은 다양한데, 우선 떠오르는 것은 한국연구재단에 연구실적을 입력할 때 "당신도 인사청문회에 설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의 팝업창을 띄우는 것이다. 토지매매 계약서 서명란 옆에도 같은 문구를 써넣고, 병무청 입구엔 "당신 아버지도 인사청문회에 설 수 있습니다"라고 써놓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관행에 몸을 맡겨 편익을 취할 만한 도덕적 딜레마의 지점 모든 곳에 이 문구를 써두는 것이다. 이런 방법이 유치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두 가지 점에서 이런 방안에 꽤 설득력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연합뉴스

장관 후보자들 대부분이 불법, 비리, 부패와 연루되어 있다고 보도되었다. 그래도 다들 자진사퇴 없이 꿋꿋이 인사청문회까지 왔다. 그럴 정도면 "뭔가 오해가 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이런 항변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저 "잘못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한다. 나이 오십줄 먹은 인간들이 천명을 펼치는 것은 고사하고 친구의 연필 훔치다 걸려서 담임선생님 앞에 선 초등학생 시늉을 하는 걸 보는 것은 짜증 나는 일이다. 더 나아가 담임 앞의 초등학생과 달리 잘못했다는 말이 믿기지도 않는다. 내 보기에 그들의 변명 가운데 진심을 담고 있는 말은 오직 "관행이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고약한 말이긴 하지만 말하는 이들부터 진심이어선지 이 "관행"이라는 말은 사람들 마음속에 파고드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이 말로부터 사람들은 법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떠올리게 되며, 장관 후보자들과 별로 다를 것 없이 유리한 관행에 몸을 실었던 경험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어제 하루 내가 했던 일만 봐도 관행과 법 사이의 좁은 길을 지난 적이 많다. 운전을 하며 네다섯 번 도로교통법을 위반했고, 불법다운로드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서 내가 죄의식을 느꼈을까? 전혀 아니다. 집의 프린터에 종이가 떨어졌을 때 사무실에서 A4 한통을 집어온 적도 있는데, 그러면서 내가 한 일은 집에서도 학교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 그래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며칠 전 후배와 저녁을 함께하고 밥값을 계산할 때 법인카드를 만지작거렸지만 끝내 쓰지 않았는데, 그때 나는 내 자신의 도덕성이 '대견했다.' 이런 수준의 도덕성을 가진 내가 장관 후보자들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관행의 바다에 자신을 맡기는 더 나쁜 태도이다. 관행과 무관한 고상한 도덕적 기준을 들이대는 방식으로 관행에 바꾸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관행의 공범의식에 자신을 맡기는 것도 도덕적 포기이기 때문이다. 관행을 바꾸는 작업은 관행의 스펙트럼 안에 명료하게 선을 긋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듯이 "도덕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어떤 선 하나를 긋는 것을 의미한다." 그 선을 어디에 긋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관행 자체를 개선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언론보도를 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다운계약서, 그때는 많이들 그랬지. 하지만 땅투기하고 문제되니 냉큼 고추 몇 그루 꽂아 놓는 건 너무한 거 아냐. 군복무 중에 대학원 다니는 것도 쫌 그런데 유학까지 가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사외이사 좋지. 그래도 거수기 노릇에 수당을 수천만원씩 챙기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제자랑 공동저자면 됐지, 제1저자는 너무 한 거 아냐. 그것도 10건 넘게. 신문 칼럼 대필은 진짜 너무 했어."

"너무했다"는 판단은 장관후보자들이 사람들 마음속 선을 넘었기 때문에 오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들이 대중의 마음속 선을 넘은 이유는 자신들의 마음속 선이 그것에서 한참 먼 데 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중이 그은 선의 자리에 깃든 도덕적 직관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 지점에서 후퇴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앞으로 나갈 수 있고, 그것이 지금 가능한 도덕적 개선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대통령은 오히려 인사청문회를 신상털기식이라고 비난하고 대중의 기준선을 탓하고 있다. 맞는 방향은 엘리트들의 기준선을 대중 가까이 당겨오는 것이다. 그러니 청문회 무력화보다는 차라리 우리 사회 엘리트들에게 항상 자신들이 어떤 이상한 분의 수첩에 이름이 올라 인사청문회에 서게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방법은 다양한데, 우선 떠오르는 것은 한국연구재단에 연구실적을 입력할 때 "당신도 인사청문회에 설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의 팝업창을 띄우는 것이다. 토지매매 계약서 서명란 옆에도 같은 문구를 써넣고, 병무청 입구엔 "당신 아버지도 인사청문회에 설 수 있습니다"라고 써놓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관행에 몸을 맡겨 편익을 취할 만한 도덕적 딜레마의 지점 모든 곳에 이 문구를 써두는 것이다.

이런 방법이 유치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두 가지 점에서 이런 방안에 꽤 설득력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우선 이 방안은 사람들에게 행운에 부응하는 인간이 되려는 도덕적 노력을 고무하는 것이기 때문에 징벌적이지 않다. 입신양명을 좋아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언젠가 인사청문회에 설 흐뭇한 순간을 그리며 자중하는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것은 효과적인 방법이다.

다른 한편 이 방법은, 인간이 도덕을 자주 망각하지만 도덕적 격률이 눈앞에서 환기되면 그래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줄 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인간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품고 있는데, 나는 내가 인간이라서 그런지 인간에 대해 낙관하는 것이 더 즐겁고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물론 이 방법에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효력을 내려면 시간이 좀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새누리당이 좋은 후보를 내려면 십여 년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