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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06일 12시 56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12월 06일 14시 12분 KST

존 포드의 젊은 링컨, 울타리에 선 한 남자

<청년 링컨>은, 링컨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라면 대충 이렇게 진행될 것이다라는 식의 모든 예상과 기대를 하나씩 하나씩 비틀거나 비껴가며 정말이지 (1939년의 영화에 어울리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비전의 링컨을 탄생시켰다. <청년 링컨>은 영화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갈수록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Young Mr. Lincoln

청년 링컨(Young Mr. Lincoln, 존 포드, 1939)

* 스포일러 있음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젊은 날의 링컨>을 보고 뭔가 써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런 영화는 권위 있는 최종적 견해라는 걸 도무지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전문가도 보지 못한 걸 당신이 볼 수 있으며 어떤 전문가도 쓰지 못한 것을 쓸 수 있다. 태그 갤러거는 「JOHN FORD-The Man and His Movies」(1986)을 2006년에 고쳐 쓰면서 "<젊은 날의 링컨>을 지금까지 50번 넘게 봤지만, 아직도 새롭게 발견하는 장면이 있다"고 말했다.

허문영(영화평론가), '<젊은 날의 링컨>에서 출발하다' 中에서.

이 글은 허문영 평론가의 저 가슴 설레는 권유와 태그 갤러거씨의 겸손한 고백에 작은 용기를 내어 이에 기대어 써내려 가는 짧은 감상문이며, 무엇보다도 존 포드의 위대한 1939년에 태어난 이 기이한 걸작, <청년 링컨>에 대한 애정고백문이다(영화의 제목은 <청년 링컨>으로 표기한다).

영화의 심연은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나는 여기서 딥 포커스 같은 촬영기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과연 영화 속의 어떤 요소 혹은 어떤 힘이 영화에 펼쳐진 이미지의 표면을 깨고, 그 안의 블랙홀과도 같은 심연을 펼쳐놓는 것일까? 단순히 영화가 전달하는 이야기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이러한 영화적인 심연에 대한 어떠한 몰입이 미국 고전영화의 위대한 장인인 존 포드가,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16대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젊은 시절을 다룬 이 영화 <청년 링컨>에 농축되어 있다면 과연 쉽게 믿겨질까? <청년 링컨>은, 링컨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라면 대충 이렇게 진행될 것이다라는 식의 모든 예상과 기대를 하나씩 하나씩 비틀거나 비껴가며 정말이지 (1939년의 영화에 어울리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비전의 링컨을 탄생시켰다. <청년 링컨>은 영화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갈수록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죽음으로 향하는 청년 링컨의 무겁게 침잠되어 있는 내면으로 떠나는 우울하기 그지 없는 오디세이(Odyssey)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꽤 단순하다. 거칠게 나누면 크게 4가지의 시퀀스만으로 구성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링컨이 법조계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기까지의 계기(실은 말이 계기이지, 이것조차 매우 모호하기 그지 없는 그런 계기)가 되는 부분,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서 본격적인 신출내기 변호사로서 일을 시작하는 링컨의 모습과, 이어서 마을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참여하여 벌이는 그만의 앙큼하고 쏠쏠한 활약상을 보여주는 부분, 축제의 주변자리에서 벌어진 클레이 형제의 억울한 살인사건의 변호를 맡아 벌어지는 일련의 크고 작은 충돌과 조우들(흥분한 마을사람들, 클레이가족, 무도회장에서의 마을 상류층)을 그린 부분, 마지막으로 클레이 형제 사건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법정드라마의 전개와 사건의 해결 부분이 그것이다. 사건을 해결한 영웅은 웃음기 하나 없이 마치 저승으로 떠나듯 어두운 언덕길을 홀로 나아가고,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면, 링컨의 그 유명한 동상이 등장하며 영화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러한 얼핏 단순해 보이는 전형적인 영웅의 스토리는 영화의 전반부 장면부터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영화적 심연을 드러내며 링컨을, 그리고 관객을 무섭게 가라앉힌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몇 개의 단순한 쇼트와 신비한 미장센 연출로 이루어진다(물론 헨리 폰다의 진정한 인생연기는 굳이 더 언급하지 않겠다). 위대한 영국의 법학자 블랙스톤의 코멘터리를 열심히 탐독하던 링컨은 친애하는 소녀 앤 러틀러지와 함께 짧은 산책을 즐긴다. 이 둘이 걸어가는 장면은 카메라가 울타리를 경계로 걸어놓고 트래킹 쇼트로 찍어 나간다. 울타리가 뚫려있는 곳에서 둘은 멈추고, 서로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앤의 옆모습을 찍던 카메라는, 앤을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는 링컨의 리버스숏을 그의 정면 얼굴을 보고 찍었다. 마치 그녀를 잡아먹을 것처럼, 약간의 앙각으로. 이 갑작스러운 불일치의 쇼트구성은 매우 기이하다. 이어서 앤은 울타리를 넘어서 사라지고, 하지만 링컨은 그 울타리를 넘어서지 않는다. 이 또한 매우 이상한 제스처로 보인다. 마치 거대한 자기장이 존재하여 이를 뚫고 나올 수 없는 사람처럼, 링컨은 뒤돌아서서 강 위에 짱돌을 던진다. 강에 이는 작은 파문(돌이켜보면, 이 장면에서 미조구치 겐지의 <산쇼다유>의 그 절망적인 죽음의 쇼트가 소환되는 것은 왜일까?)은 이어서 얼음덩어리가 떠다니는 겨울의 강 장면으로 디졸브되고, 아까 링컨이 차마 건너지 못한 울타리 너머 눈덮힌 공터에는 앤의 무덤과 묘비가 어느새 "존재"하고 있다.

이 그저 놀랍기만 한 상황 앞에서 관객들이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문득 불과 방금 전의(하지만 영화 속 시간은 이미 오래전인) 링컨의 그 기이한 리버스숏과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한 그 이상한 제스처는 의미와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심연의 쇼트로서 새로이 상기된다. 여기에 울타리 너머로 쉬지 않고 흐르고 있는 얼어붙은 강의 미장센은, 그들을 둘러싼 세월의 흐름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생과 사의 경계에 선 초현실주의적인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링컨에게 목표와 꿈을 이야기하던 앤이라는 소녀의 상큼한 존재감이 얼어붙은 죽음으로 결빙되어버렸다는 충격을 넘어서서, 불과 몇 개의 쇼트들과 섬세한 미장센의 영화적 연출만으로 억겁과도 같았을 고통의 시간을 농축시켜서, 젊은 링컨을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기억과 어두운 내면의 모습을 간결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전반부 시퀀스는 두고두고 보아야 할 위대한 명장면이다.

영화는 내내 젊은 링컨에게 부재한 가족, 더 정확히는 어머니에 대한 끝없는 갈구를 이야기한다. 오프닝 크레딧에 이어서 나오는, 마치 어머니의 혼령이 아들을 찾아 속삭이는 듯한 한 편의 시(詩)는 법정영화임을 가장하고 있는 이 영화의 숨겨진 진짜 주제이다. 축제 과정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으로 흥분한 군중을 링컨이 훌륭한 연설로 달랜 장면 그 다음을 떠올려보자. 사건의 시급성과 위중함을 떠올린다면, 보통 영화같았다면 살인용의자로 몰린 클레이 형제를 만나서 자초지종을 듣는 장면이 당연히 나왔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 이상하게도 클레이 형제의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떠나보내는 링컨의 장면을 이어 붙인다.(실은 "변호사" 링컨이 클레이 형제를 직접 만나 변론 작전을 짜는 장면은 아예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링컨과 클레이 형제의 어머니 간의 대화장면은 상상선을 무시한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물론 마차라는 좁은 공간이 가지는 연출상의 한계를 고려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같은 쪽에 위치한 두 사람의 시선이 일치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화면이 붙어있다. 더 나아가 두 사람이 동화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도 불러일으킨다. 이들의 묘한 관계는, 링컨이 클레이 가족이 살고 있는 시골로 찾아가는 장면에서 더욱더 명징하게 드러난다. 링컨은 여자들만 남아있는 클레이 가족의 집에서 마치 클레이 형제를 대신한 아들이자 남편, 애인처럼 행세한다. 장작을 패고, 어머니와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꺼내고, 순무요리가 먹고 싶다고 요구한다. 억울한 누명으로 죽음에 이르게 될 수도 있는 두 형제의 안위보다는 클레이 가족의 품 안에서 어떠한 위안을 받고 있는 젊은 링컨의 모습에 영화의 무게중심이 이동해 있다. 클레이 형제 살인사건은 이 영화 전체를 끌어가는 원동력처럼 보이지만 실은 철저한 맥거핀(macguffin)이며, 어머니와 사랑하는 소녀를 죽음으로 잃어버린 청년 링컨의 상처받은 내면을 계속해서 유령처럼 영화를 떠다닌다.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상류층 여인의 적극적인 '썸'을 뒤로 한채, 죽음처럼 흐르는 강물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는 링컨의 뒷모습은 그렇게 죽음과 맞닿아 있다.

포드가 보는 젊은 날의 링컨은 울타리에 서 있는 남자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걸어갈 수는 있지만 울타리를 함께 건너오지 못하고, 살인사건이 벌어져 난동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울타리 너머로 지켜보며, 마을의 유지들과 흥겨운 청춘남녀들이 모인 무도회장으로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문턱의 경계에서 오고가는 남자이며, 법정에서의 결정적인 장면에서도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진범을 격렬하게 추궁한다. 혹은 링컨의 몸 그 자체가 울타리이기도 하다. 첫 등장 장면부터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스스로의 마음에 차지 않는 세상에 대한 무심한 방관자적 제스처로 보이기도 한다. 이뿐인가? 나무에 두 다리를 얹어놓고 블랙스톤의 책을 읽고 있는 모습,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의뢰인들을 가로질러 다소 건방지게 보일 정도로 다리를 창가쪽에 올려놓고 있는 모습, 적당한 화해로 유혹하는 판사의 충고가 듣기 싫다는 듯 긴 다리를 쭉 뻗어올려 귀를 막아버리는 듯한 모습은, 젊은 링컨이 세상을 대하는 울타리적 자세, 경계인으로서의 제스처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법정에서의 장면은 젊은 링컨이 세상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화면의 근경에 그림자같은 실루엣으로서 종종 비쳐지는 링컨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관객과 함께 일정 거리로 물러서서 법정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이야기들을 넌지시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결정적으로, 두 아들 중에 누구를 살인자로 선택할 것이냐라는 검사의 잔인한 추궁 앞에서 어머니의 시선이 애타게 링컨을 찾을 때, 인물의 시선의 영화적 일치라는 부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존 포드는 거의 냉혹할 정도로 끝내 링컨의 시선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예외적으로 마치 슬쩍 끼어드는 것처럼 변호사 링컨은 목소리 사운드로 다시 법정에서의 어머니의 곤경에 개입한다. 이 지점에서, 법정 영화로서의 외피를 화려하게 두르고 있는 이 영화에서 변호사 링컨의 존재와 역할만큼 기괴한 것은 없다고 할 것이다.

링컨, 그는 이 법정 영화에서 솔직히 변호사라기보다는 재능있는 만담가이자, 심지어는 TV 토크쇼의 사회자처럼 보인다(법정 안의 군중들의 기계적인, 마치 시트콤적인 웃음소리!).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법조인이 아닌 엘러리 퀸과 같은 탐정으로서 번쩍이는 직관을 동반한 갑작스러운 번개처럼 사건을 종결짓는다. 한편으로, 변호사 링컨은 마그나 카르타와 정당방위에 토대를 둔 격조높은 변론를 무기로 삼기보다는 끊임없는 말꼬리 잡기와 이름가지고 노는 유치한 인신공격에 대부분 의지한다. 보다 직접적으로 그는 세상과 직접적으로 맞서기 보다, 광대 혹은 배우의 연기를 통해 세상을 조롱하고 가지고 놀며, 그 허점을 통렬히 공격하는 타입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젊은 링컨은 세상의 이치를, 세상을 대하는 방법을, 그래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너무나 일찍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을 텅빈 존재로 만들어 놓고서 마치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아서 세상과 싸워나가는 방식을 터득한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 가족의 부재, 사랑하는 이의 죽음의 기억이 젊은 링컨의 이러한 울타리에서의 투쟁 방식을, 경계선 위에서의 싸움의 방식을 깨우쳐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의 방관자적인, 텅빈 수정과도 같은 영혼없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뜨거운 환대를 보낸다. 존 포드의 영웅 답게 문의 격자틀 안으로 쏟아지는 빛을 맞으며 세상의 환호성으로 나서는 링컨의 모습은 무척이나, 정말이지, 외로워보인다.

클레이 형제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지 않았다면, 젊은 링컨의 삶은 오히려 클레이-유사가족의 품 안에서 더욱더 충만하고 행복하지 않았을까? 위선으로서의 삶, 가면으로서의 삶, 연기자로서의 삶, 투명한 수정체로서의 삶을 결국 (떠밀려서, 정의라는 이념의 굴레 속에서) 기어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링컨은, 클레이 가족과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어두운 심연의 언덕길을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가 향하는 곳은 (누구나 알고 있는)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죽음이라는 운명이다. 그리고 이때 그와 함께 하는 것은, 어느새 그를 가두고 있는 (듯한) 검은 실루엣의 울타리 뿐이다. 이어서 어디에서도 위로 받지 못하고 기나긴 죽음의 여정을 떠나야 하는 젊은 링컨을 향한 존 포드의 눈물처럼 세찬 비가 내린다. 세상의 잔인한 굴레와 그 앞에선 끝을 모를 고독과 심연 앞에서, 작가의 슬픈 눈물이 아롱진다. 나는 이렇게도 가슴 사무치는 전기 영화의 클로징을 알지 못한다.

링컨과, 그리고 슬픈 우리 젊은 날을 기리며...

2014년 10월 4일 오후 4시 30분부터 서울아트시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