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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27일 07시 24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8월 27일 14시 12분 KST

결국 언론이 남북관계 망칠지도 모른다

합의문 이후 방송을 보면 이번 "남북 협상이 궁지에 몰린 북한을 상대로 우리가 이긴 결과",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과 단호함이 북한에 통했다", "불리함을 느낀 북한이 결국 양보했다"는 식의 일방적 주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굴복을 전제로 한 승리는 전쟁의 논리이지 외교의 논리가 아닙니다. 이 합의문은 결코 북한의 항복문서가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아닌 외교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연합뉴스

합의문 이후 방송을 보면 이번 "남북 협상이 궁지에 몰린 북한을 상대로 우리가 이긴 결과",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과 단호함이 북한에 통했다", "불리함을 느낀 북한이 결국 양보했다"는 식의 일방적 주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굴복을 전제로 한 승리는 전쟁의 논리이지 외교의 논리가 아닙니다. 이 합의문은 결코 북한의 항복문서가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아닌 외교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이야 상대방을 패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나 외교는 상대방에 그런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는 것입니다. 즉 승리자와 패배자로 나뉘지 않고 모두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이 외교적 성과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지금 방송의 일방적 주장이 초래하는 문제는 협상의 상대방을 칭찬해줄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박탈한다는 데 있습니다. 보통 이런 합의문이 나오면 협상의 상대를 향해 "진정성 있게 협상에 임한 상대방을 평가한다"며 서로 사의를 표할 수 있는 기회는 최소한 한 번쯤 있어야 합니다. 김관진 실장이 25일 새벽에 합의서 낭독하면서 이 말을 했어야 합니다. 성실하게 협상에 임한 북한 대표에게도 사의를 표한다고요. 이럴 때 상대방은 내면에서 우리에게 설득, 회유, 흡수되는 것입니다. 남과 북의 노인네들이 며칠 밤 못 자고 고생했으면 언론이 "다 같이 수고했다"고 등 토닥여 주는 말 한 번쯤 해야 이 외교적 성과는 확장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방송을 보면 북한에게 합의문에 서명한 것에 대한 굴욕감을 강요하고 모멸감을 주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남북관계가 잘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이것이 불안합니다.

이번 판문점 회담은 남북한을 파국으로 이끌지도 모르는 전쟁의 위기를 제거하는 데 있었습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과 소련이 무슨 거창한 합의를 했습니까? 쿠바 소련 미사일과 터키의 미국 미사일을 모두 철수시킨다는 것 말고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걸 가늠할 수 있는 합의서란 게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이것이 위기관리의 성공적 사례라고 말하는 이유는 터지기 직전의 3차 대전의 뇌관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판문점 회담 역시 전쟁위기 속에서 다급하게 열린 것이라면 한반도 전쟁위기를 효과적으로 차단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성공한 것이고, 남과 북이 모두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가 이겼다", "북한이 굴복했다"는 평가는 부차적인 것이고 본질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말 늘어놓는데 그 많은 전문가와 주파수가 낭비된다는 것입니까?

북한은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요? 북한이 그런다고 우리도 그래야 합니까? 우리는 강자입니다. 적어도 우리 체제에 대한 자긍심과 자신감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도덕, 우리의 규범, 외교의 보편적 논리에 따라야죠. 그게 북한을 진정으로 이기는 길입니다. 만일 그럴 정도의 자제심마저 없다면 이 합의서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이 외교적 성과가 너무나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