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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04일 07시 03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5월 04일 14시 12분 KST

3·1절에 짓밟힌 중견국가의 꿈

ASSOCIATED PRESS

"민족감정은 여전히 악용될 수 있고, 정치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런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 몇번 곱씹게 되는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의 말이다. '값싼 박수', '도발'과 같은 자극적인 용어는 누굴 향한 것인가? 과거를 부정하는 일본을 꾸짖는 중국과 한국의 정치지도자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진핑 주석과 박근혜 대통령 말고 누구이겠는가? 졸지에 이 지도자들은 값싼 박수나 받는 도발자가 되고 말았다. 반면 일본의 아베 총리는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려는 품격 높은 지도자가 되었다.

3·1절 아침에 비수처럼 꽂히는 이 말. 우리의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 소리다. 작금의 국제정세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의 길을 찾아내라는 소리다. 이 역사의 본질에 정신을 집중하라는 각성의 소리다. 지금 미국은 중국의 부상이 필연적으로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게 되어 있고, 그 결과 언젠가 미-중 간에는 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미국은 20세기 초에 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의 변화를 방관하다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고 냉전을 감수하는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했다. 그러니 21세기에는 아시아에서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세력균형의 변화를 방치하지 않고 사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재균형 전략', '아시아로의 회귀'를 표방한다. 그런데 한국이 과거 역사에 매몰되어 한·미·일 삼각 안보동맹 참여를 주저하고 있으니 이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나온 거친 협박이다.

어느 정도 한국의 태도 변화를 기다리던 미국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국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 값싼 민족주의 감성이라며 한-일 관계를 개선하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제 과거 역사라는 중고차는 도매금으로 폐기처분하고 그 대신 값비싸고 안락한 신형차에 탑승하라는 이야기다. 지난해에 미국은 얼마나 급했으면 한·미·일 삼국의 국방차관이 모여 정보공유 약정을 체결하기로 한 계획을 무산시키고 펜타곤의 하급관리를 보내 약정서에 서명을 받아갔다. 조인식도 하지 못한 일종의 '택배기사 약정'이다. 그만큼 미국의 호흡이 거칠 뿐만 아니라 급하기까지 하다. 개발에 성공하지도 못했고 한국에 배치할 물량도 없는 사드 요격미사일 체계를 벌써부터 한국에 배치하려는 여론을 조성하는 것도 바로 그런 미국의 조급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중국의 부상 속도가 너무 빨라 시간이 없다.

이런 압박이 매일 한국 정부를 옥죄어오는 지금은 역사적 정의에 대한 우리의 진지한 성찰마저도 사치가 되어버렸다. 그래서일까? 3·1절의 태극기가 지금처럼 초라해 보인 적도 없다. 광화문 빌딩마다 내걸린 태극기는 귀퉁이가 풀렸는지 너덜너덜하고 정부청사의 태극기는 바람을 이기지 못해 죽 찢어졌다. 누런 황사바람에 부황이 든 것 같은 태극기 내걸고 정체 모를 애국심 타령을 하는 동안 국제정세는 청나라와 일본의 패권이 충돌하는 100년 전으로 회귀하고 있다. 항상 이렇게 외세에 강점당하고 주권을 유린당했던 한민족이 자기방어의 기제로 간직해왔던 민족주의는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 진영 논리를 초월하여 모든 국가와 선린의 우호관계를 도모하려는 중견국가 평화한국의 꿈도 짓밟히고 있다. 열광적으로 미국을 숭배하고 동맹을 외치던 저 보수정권도 미국으로부터 귀싸대기를 맞고 갈 길을 찾지 못해 거리를 헤매고 있다. 이 깡패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각성해야 한다. 자존감마저 잊어버리고 함부로 줄서는 순간 우리는 산과 들과 하늘까지도 빼앗긴다. 그것이 3·1절에 부르는 우리의 만세 소리이며 민족자존의 함성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