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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2월 10일 08시 57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2월 10일 14시 12분 KST

앤서니 퍼킨스라는 이름의 질병

<싸이코>와 <페드라> 속 앤서니 퍼킨스가 지닌 치명적인 매력의 안부를 묻다

늘 헛갈리는 게 있다. 빤한 사실인데도 헛갈린다. 뭐 그런 게 다들 한두 개씩은 있지 않던가. 나는 언제나 <페드라>가 <싸이코>보다 먼저 나온 영화라고 생각해버린다. 히치콕의 <싸이코>가 줄스 다신의 <페드라>보다 2년 먼저 나왔는데도 말이다. 그래 <싸이코>는 1960년이고 <페드라>는 1962년이지, 그런데 <페드라>가 <싸이코>보다 먼저야, 이런 식이다. 앤서니 퍼킨스 때문이다. <페드라>와 <싸이코>의 주연은 모두 앤서니 퍼킨스다. <페드라>에서 앤서니 퍼킨스는 새엄마 페드라와 사랑에 빠진 아들을 연기한다. 모든 게 망가져버린 그 순간 앤서니 퍼킨스는 은빛 애스턴 마틴에 몸을 싣고 그리스의 해변도로를 달리며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단조>를 미친 듯이 따라부르고 새엄마의 이름을 비명지르듯 외치다가 끝내 절벽에 떨어져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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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내 머릿속에서 앤서니 퍼킨스는 신에게 다시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다시 태어나는 걸 허락받는다. 그래서 다시 태어났는데 이런 씨발, 하필이면 <싸이코>의 노먼 베이츠야. 엄마가 베이츠 부인이야. 알고 보니 베이츠 부인도 페드라가 다시 태어난 거야. 결국 페드라의 망령에 사로잡힌 앤서니 퍼킨스는, 아니 노먼 베이츠는 엄마의 수족이 되어 베이츠 모텔을 운영하며 조용히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 날 마리온이라는 이름의 금발 여성이 찾아오는데. 내 머릿속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앤서니 퍼킨스라는 이름의 저 배우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긴 팔과 긴 다리를 대기 중에 허우적대며 우아하기 짝이 없는 길고 흰 손가락으로 페드라를 만질 때 나는 잠시나마 그녀를 질투했다. 어린 눈에 보기에도 앤서니 퍼킨스는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어딘가 병적이었다.

어딘가 질병 같은 사내였다. 열이 끓어오르고 고통을 자아내는 질병이 아니라, 별다른 징후나 증상 없이 찾아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질병 같았다. <페드라>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새엄마를 두고 분투하는 알렉시스를 연기할 때도, <싸이코>에서 이미 죽고 없는 엄마에 빙의되어 자신에게 접근하는 여성들을 도살하는 노먼 베이츠일 때도, <심판>에서 인간이라는 자기 한계에 부딪혀 자폭할 수밖에 없는 케이를 연기할 때도, 앤서니 퍼킨스는 늘 창백하고 유약하지만 치명적인 공기로 관객을 집어삼켰다. 그러고보면 앤서니 퍼킨스는 줄스 다신의 <페드라>에서 그리스 비극적인 인간형을, 히치콕의 <싸이코>에서 프로이트적인 인간형을, 오슨 웰스의 <심판>에서 카프카적 인간형을 모두 눈부시게 연기해냈다. 이토록 위대한 배우의 전성기가 짧았다는 건, 그리고 <싸이코>의 후속편들에 출연해 스스로의 커리어를 갉아먹었다는 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페드라>는 앤서니 퍼킨스가 등장하는 영화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페드라>는 그리스 신화의 파이드라(이하 페드라) 비극을 각색한 영화다. 줄스 다신 감독의 아내이기도 한 멜리나 메르쿠리가 페드라를 연기했다. 메르쿠리는 어디까지나 아름답고 훌륭한 배우지만, 페드라 역할로 적합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감독이 아내를 캐스팅하는 일은 법으로 막아야 한다.

페드라 비극은 팜므파탈의 원형으로 손꼽힌다. 그리스 신화에서 페드라는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의 아내다. 신화 속 페드라와 에우리피데스의 페드라와 라신의 페드라가 서로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골자는 페드라가 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토스에게 사랑을 고백한다는 점이다. 히폴리토스는 새엄마의 구애를 단박에 거절한다. 히폴리토스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을까봐 페드라는 전전긍긍한다. 그러다가 남편에게 "당신 아들에게 추행당했다"며 거짓을 고한다. 분노한 테세우스는 아들을 저주하고 추방한다. 히폴리토스는 전차를 몰고 떠나다가 절벽에 떨어져 죽는다. 에우리피데스와 라신의 버전에서는 페드라도 자살한다.

영화 <페드라>는 무대를 현대 그리스로 옮겨왔다. 남편은 선박왕이다.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알렉시스는 영국에서 유학 중이다. 남편은 알렉시스를 그리스로 불러들여 사업을 물려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아내 페드라를 시켜 알렉시스를 그리스에 돌아오도록 종용하게 만든다. 영국에서 조우한 페드라와 알렉시스는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러나 금방 친숙해진다. 어렸을 때 새엄마 페드라를 미워했던 알렉시스도 지금은 더이상 그렇지 않다. 아니 오히려 아름다운 페드라에게 끌린다. 둘은 사랑에 빠진다. 불같이 사랑에 빠졌던 둘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알렉시스는 상처를 받는다. 알렉시스가 그리스에 돌아오자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며 사업상 정략결혼을 시켜 사업을 물려주려 한다. 그러나 알렉시스를 포기하지 못한 페드라는 이에 반대하며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모두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신화 속의 페드라는 남편에 대한 공포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은 아들을 향한 분노로 치명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이었다. 영화 속의 페드라는 신화 속의 인물과는 다르다. 영화 속 페드라는 이미 예견되어 있는 파멸에도 불구하고 안락한 미래를 내팽개치며 사랑을 위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인물이다. 그녀는 영화 중반 이후 계속해서 망설이고 고민하고 조금씩 미쳐간다. 그러나 알렉시스가 자신을 여전히 사랑한다는 걸 확인한 이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세속적인 영락을 포기하며 자기 선택을 실행에 옮긴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현실에서 잘 벌어지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영화 <페드라>의 페드라는 악녀가 아니라 신념이 있는 캐릭터다. 영화 <페드라>를 팜므파탈 영화의 카테고리 안에 두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신경 쓰이는 건 앤서니 퍼킨스가 연기하는 알렉시스가 마지막 질주를 위해 은색 에스턴 마틴을 차고에서 끌어내는 순간이다. 얼마 전 아버지가 사준 새차다. 영화에서 차가 그리스에 도착했을 때 딱 한번 몰았다. 그런데 차고에서 후진으로 빠져나오는 차를 잘 보면 운전석쪽 문이 찌그러져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차의 문이 찌그러져 있다니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 솜씨 좋은 덴트 가게를 소개해주고 싶어진다. 대체 어느 틈에 찌그러트린 걸까. 그러고보면 알렉시스가 죽음을 맞이한 건 아버지의 저주 때문도 아니고 포세이돈의 복수 때문도 아니고 페드라의 폭로 때문도 아닌, 그냥 알렉시스가 운전을 잘 못해서일지도 모르겠다. <페드라>를 다시 꺼내보고 나면 마지막 순간 알렉시스가 입이 찢어져라 따라부르던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단조>를 반복해서 몇번이고 듣게 된다. 누구나 그럴 거다. 오리지널 트랙에는 '안녕 요한 세바스찬'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좋은 제목이다. 안녕 바흐, 안녕 페드라, 안녕 알렉시스. 안녕.

* 이 글은 씨네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