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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4월 11일 13시 07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6월 11일 14시 12분 KST

옥소리 사태와 'N분의 1의 폭력'

<택시>의 옥소리편이 방영되고 G씨가 지명수배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별안간 '옥소리 남편 지명수배 중, 허지웅 멘붕'이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멘붕한 적이 없다. 다만 저런 인과관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기자들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라는 사실 앞에 멘붕했다. 택시 제작진도 모르는 걸 내가 어찌 알 것이며, 그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으며,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tvN

1.

영화 <우아한 거짓말>은 왕따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집단폭력이라는 '사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명쾌하게 보여준다. 대개의 집단폭력에는 뚜렷한 단 한 명의 가해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1/N의 느슨한 적대감 혹은 방관들이 존재할 뿐이다. 집단폭력은 바로 그 1/N의 폭력이 모여 촉발된다. 오직 단 한 명의 명쾌한 가해자를 심판대 위에 세우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1/N의 폭력이라는 말 자체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아한 거짓말>은 집단이라는 익명성 뒤에서 책임지지 못할 1/N의 폭력을 저지른 개별의 주체들을 차례차례 호명하는 영화다. 그렇게 호명된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그런 파국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집단행위란 거기 가담하는 개인을 익명으로 만들기 때문에 개별의 지분을 축소하는 착시효과를 낳기 마련이다. 스스로 폭력의 주체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1/N의 폭력이 무서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2.

옥소리의 복귀가 무산되었다. 그녀는 간통 논란과 칩거 기간을 뒤로 하고 연예계에 복귀하고자 했다. <택시>에 출연하여 문제의 이탈리아 요리사 G씨와 재혼해 두 명의 아이를 출산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해당 방송분이 전파를 탄 직후 남편 G씨가 간통으로 옥소리씨의 전남편 박철씨에게 고소당했고, 그 때문에 아직 지명수배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제작진은 몰랐다고 해명했다. 언론과 여론의 추이를 확인한 옥소리는 국내에서의 연예계 활동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3.

나는 <썰전>에서 옥소리 사태를 다루면서 개인의 사생활에 관해 과잉 몰입하는 대중과 언론의 경향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더불어 도무지 그 실체가 집계 가능한 물리적 수준으로 구체화되거나 가늠되지 않는 소위 '대중'이라는 집단에 대해 "타인의 삶에 대해 일체의 흠결조차 허락하지 않는 유리멘탈의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덧붙였다. 이후 <택시>의 옥소리편이 방영되고 G씨가 지명수배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별안간 '옥소리 남편 지명수배 중, 허지웅 멘붕'이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멘붕한 적이 없다. 다만 저런 인과관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기자들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라는 사실 앞에 멘붕했다. 택시 제작진도 모르는 걸 내가 어찌 알 것이며, 그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으며,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애초 내가 지적했던 건 개인이 책임지고 짊어져야 할 사생활의 영역에 과몰입하여 사사로운 정의감으로 욕설을 퍼붓는 자들과 그에 편승한 언론이다. 연예인은 대중의 사랑으로 벌어먹고 살기 때문에 그래도 된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은 회사에서 오너의 사랑으로 벌어먹고 사는 것인가. 옥소리는 간통이라는 자기 행동에 대해 법적 처분을 모두 마쳤다. G씨의 간통죄 지명수배 사실은 옥소리의 복귀에 있어서 '반전'이 될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했을 매우 한국적이고 전근대적인 죄명으로 무려 지명수배까지 당한 G씨가 불쌍할 따름이다.

4.

이번 사태에서 가장 악랄한 건 언론이다. 1/N로 이루어진 집단폭력에 기생하며 그것을 부추기고 모든 사안을 가십화하여 사유가 아닌 충동적 심판질만을 가능케하는 언론의 저열함 말이다. 이들은 믿을 수 없이 멍청하고 견딜 수 없이 소란스러우며 참을 수 없이 부지런하다. 나는 이러한 행태를 보인 매체의 기자와 데스크, 그리고 '대중'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1/N의 폭력을 자행한 십자군들이, 그들이 타인에게 강요했던 꼭 그만큼의 세상-개인들의 사사로운 정의가 아비규환으로 뒤엉키고 충돌하여 사적복수와 고성과 참극이 난무하는 지옥-안에 갇혀 영원히 고통받으며 궤멸하길 소망한다.

5.

이토록 교회가 많은 나라에서 나 같은 냉담자마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의 교훈이 쉽게 간과된다는 건 괴상한 노릇이다.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대목은 이 불행한 여인에게 연민을 가지라는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대목에서 방점은 "먼저"에 찍히는 것이다. 백개의 돌팔매 안에 돌멩이 하나로 숨어 있을 때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1/N이라는 익명의 폭력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이 타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라는 이야기다. 그것을 알고도 책임질 수 있으면 돌을 던지라는 말이다. 그럴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