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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9일 06시 10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12월 30일 14시 12분 KST

가만히 나를 들여다본다

pregnant

얼마 전 홍석천 형을 행사장에서 만났다. 누군가와 사소하게 함께했던 순간들이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이 형을 떠올리면 같이 방송을 하던 시절 녹화 전에 나누어 피웠던 담배가 생각난다. 지금은 둘 다 연초를 끊었고 조금씩 늙었다.

연말을 맞아 연인이 없는 솔로들을 모아놓고 진행하는 강연회였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굉장히 잔인한 표현 같은데 실제 취지가 그러했고 흔히 상상할 법한 그림과는 달리 행사장 분위기도 흥겹기 짝이 없었다. 같이 무대에 올라 사람들을 앞에 두고 잡담을 나누었다.

나는 사실 <마녀사냥> 초반 때만 하더라도 홍석천 형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었다. 녹화 중에 형이 이야기를 할 때는 싫은 내색을 노골적으로 비쳤다. 몇 번은 크게 싸울 뻔도 했다. 한번은 복도를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말리는 가운데 형이 "쟤는 호모포비아도 아닌데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고 내가 "형을 싫어하는 걸 호모포비아로 생각하는 건 대단한 자의식 과잉"이라고 응수한 일도 있다.

형의 예능 캐릭터 때문이었다. 형은 커밍아웃을 한 게이 방송인이라는 흔치 않은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게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형이 이성애자 남자 출연자들에게 쉽게 추파를 던지거나 세련되게 다듬어지지 않은 게이 농담을 할 때면 그걸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형의 그런 모습이 성소수자에 관한 편견과 오해를 거꾸로 강화시킨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늘 하던 그거 그만하고 이제 좀 다른 걸 보여주길 바랐다. 형이 이성애자 남자 출연자에게 키스하는 시늉이라도 하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큰 한숨을 내쉬며 호모포비아들의 행동이나 형의 캐릭터 플레이는 결과적으로 다를 게 없다고 신경질을 냈다.

생각이 바뀌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형의 모습이 성소수자들에 관한 편견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내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형을 친근하게 생각했다. 나아가 성소수자 문제에 관해서도 보다 열린 마음으로 대하게 된 것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는 걸 인지하고 나는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틀리고 형이 옳았다. 내가 한 건 성소수자라는 문제의 벽을 더욱 두텁게 쌓아올린 것이었고 형이 한 건 그 벽을 부순 것이었다. 나는 실수를 빨리 인정하는 편이다. 그 뒤로 나는 형의 말을 잘 듣는 동생이 되었다.

이 일은 내게 여러모로 생각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생각의 방향이 반드시 옳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생각의 방향이 경직된 사고에 갇혀버렸을 때 그 결과는 옳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변질된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너무 단단해져서 옳고 그름에 관한 선명한 잣대를 나만이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타인을 심판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괴물이 되기 마련이다.

내가 그런 가능성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나는 늘 옳고 그름에 관해 저 홀로 알고 있는 것처럼 오만하게 구는 행위를 경계해왔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실수를 했고, 그래서 내심 충격이 컸던 것 같다. 경직된 사고에 갇혀 있는 사람은, 자기 사고가 경직되어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남처럼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행사날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나는 이 형에게 의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번 더 놀라게 되었다. 역시 <마녀사냥> 출연 당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여기 앞서 쓴 대로 성소수자를 향한 편견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형을 싫어했지만, 결국 내가 틀렸고 형이 옳았다는 이야기를 막 끝낸 참이었다.

갑자기 형이 프로그램 초반에 나 때문에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마녀사냥>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출연자들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언론이나 여론의 관심이 내게 쏟아지자 형은 어쩔 수 없는 질투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그래서 매일매일이 괴롭고 힘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여태 단 한 번도 내가 누군가에게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 질투를 느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건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질투를 느끼는 사람을 실제 만나더라도 당신의 질투는 근거가 없는 오해일 뿐이다, 당신이 질투를 느끼는 건 실제의 내가 아니라 당신 머릿속에 있는 가상의 나일 뿐이다, 라고 내심 생각하며 넘어가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래 질투를 느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내가 질투를 살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걸 일종의 겸손함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질투를 살 만한 사람이 아니고 너는 뭘 모르는 거고 나는 불행하다'는 생각은 역설적으로 내가 겸손한 사람이 되지 못하게 방해해왔다.

나는 오래전부터 행복하지 않으면 패배자인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에 대해 불만을 가져왔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인증하고 전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그래서 어리석어 보였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감추지 않고 말하는 건 그런 사람들에 대한 반발심이기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반발심 때문에 행복에 중독된 사람들만큼이나 어느 순간 불행에 중독되고 종속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자존감의 배경이 불행이라는 건 웃기고 슬픈 일이다.

언젠가부터 글로 풀어 써내지 않으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아챌 수 없었던 것 같다. 글로 쓰면 늘 명확해졌다. 언제나 경계해왔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옳고 그름의 문제와 타인에 대해 쉽게 판단해버린 일. 그리고 타인의 질투마저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불행을 자신하는 오만함. 머릿속에서는 둘 다 내가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일이지만 결국 이 또한 나였다. 자기 삶을 현명하게 운영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란 도대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 글을 쓰지 않고서는 이마저도 유지해나갈 수 없다.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가 없다. 그래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이 지면에 내 이야기를 채워왔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매번 그랬고 오늘도 그렇지만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건, 내가 나를 아직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다. 부디 우리 모두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먼발치에서 남처럼 관찰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그런 한 해가 되기를.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