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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1일 08시 35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12월 22일 14시 12분 KST

관객을 무너뜨리는 〈라라랜드〉의 엔딩 신

판씨네마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만약에, 라고.

가장 괴로웠던 순간에는 늘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만약에 그때 내가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그때 훼방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만약에 그때 거기 가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술을 마시고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그때 니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조금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만약에 니가 조금 더 우리를 믿었다면. 만약에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만약에 인연이 끝났던 그 마지막이라도 다시 되풀이할 수 있다면. 만약에. 만약에. 그렇게 만약에, 가 쌓여 뭔가 단단히 움켜쥘 수 있는 닻과 같은 것이 되어준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 이 꼴사납고 남부끄러운 감정의 파고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나 인생은 대개 꼴사납고 남부끄러운 일의 연속이다. 우리는 이별에 특정한 계기가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되돌리지 못해 있는 힘껏 자책을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 헤어지는 건 '그냥' 헤어지는 거다. 만약에, 를 여러 번 곱씹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만약에, 라는 말은 슬프다. 이루어질 리 없고 되풀이될 리 없으며 되돌린다고 해서 잘될 리 없는 것을 모두가 대책 없이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만약에, 는 슬픈 것이다. 당신이 〈라라랜드〉에 무너져내렸다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라라랜드〉는 감독의 전작 〈위플래쉬〉만큼이나 빈구석이 보이지 않는 영화다. 고전 뮤지컬영화들에 대한 존경으로 점철된 이 영화는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선택해 옆으로 길어진 꼭 그만큼이나 더 많은 '봐야 할 것들'이 기분 좋게 들어차 있다.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보자. 스코어가 끝나는 순간 고가도로를 점령하고 있는 차들의 꼬리를 따라 끝까지 시선을 이동해보면 스크린의 마지막 한뼘에 이르기까지 배우들이 혼신의 노력을 다해 몸짓을 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최선이 담긴 흥겨움은 반드시 전염된다. 시작부터 관객은 무장해제당한다.

흥겨운 영화는 종종 난장으로 빠지기 일쑤다. 그러나 데이미언 셔젤은 화면 위의 모든 것들을 흡사 악기처럼 조율해낸다. 웃음도 증오도 일말의 머뭇거림도 그의 영화에서는 우연의 산물이 아닌 온전히 의도된 구성으로 제 기능을 한다.

이렇게 악기의 조율을 떠올릴 정도로 완전히 통제된 영화의 경우 숨이 막힐 것 같다는 불평이 생기기도 한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앞에 속수무책으로 압도되는 걸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관객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데이미언 셔젤은 그렇게 잘 조율되고 통제된 영화를 만들면서도 관객이 자신의 기억을 투영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여유 또한 확보해낸다.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처럼 말이다. 진짜 재능이란 이런 것이다.

사실 나는 마지막 시퀀스를 보기 전까지는 거의 이 영화를 싫어할 뻔했다. 물론 〈라라랜드〉는 즐겁기 짝이 없고 따라 부르고 싶은 음악이 함께하며 같이 추고 싶은 춤으로 가득했다. 뮤지컬영화에서 완전무결한 내러티브를 기대하는 건 욕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게 고전 뮤지컬영화의 재현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라라랜드〉의 갈등 구조는 지나치게 쉽고 편하다. 그 '지나치게 쉽고 편한' 내러티브가 안일한 연출이나 각본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 감독이 철저하게 의도한 그림이라는 게 시종일관 너무 빤하게 드러나서 영화를 보는 동안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특히 주인공들의 태도가 너무 나이스하다. 어떤 종류의 결핍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낭만적으로는 보여도 현실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예술가와 배우 지망생의 사랑에 현실적인 재정 문제는 잘 드러나지 않고, 누군가 떠나가고 떠나보낼 때마저 너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네가 성공한 건 내 덕분이야, 내가 실패한 건 너 때문이야, 따위의 지저분한 자존감 대결도 보이지 않는다. 〈라라랜드〉에 공감할 수 없다는 관객의 팔할은 주인공들의 태도에 몰입하지 못한 결과일 공산이 크다.

만약 생살을 긁어 파내듯 아프기 짝이 없는 〈라라랜드〉의 현실적인 버전을 보고 싶다면 라이언 고슬링이 출연한 영화 〈블루 발렌타인〉을 보는 게 나을 것이다. 이 비관적이고 현명한 영화는 연애 문제를 앓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이터널 선샤인〉 〈500일의 썸머〉와 함께 불멸의 레퍼런스로 오랫동안 언급될 만하다.

〈라라랜드〉의 모든 갈등은 예상한 시점에서 찾아오고 쉽게 해결된다. 빤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채우는 정서는 좋게 말해서 낭만적이고 정직하게 말해서 예측 가능한 지루함이다.

겨울이 오기 전, 그러니까 마지막 시퀀스 전까지 그렇다는 이야기다.

〈라라랜드〉는 이 영화가 1950년대가 아닌 2016년에 개봉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현대적인 뮤지컬영화로 정체성을 확실히 한다. 현실감각과 진중함, 그리고 사유의 가능성마저 모두 챙기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주인공들이 다시 만나고, 그들이 가장 행복했을 것 같은 버전의 '만약에'가 화면을 채운다. 즐겁고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 그럴 리가 없다. 주인공의 가정은 완전 무결한 환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논리도 없고 앞뒤도 맞지 않으며 등장인물들은 상황에 맞지 않게 행동하고 시공간은 수시로 허물어져 뮤지컬 스코어와 함께 어우러진다. 말 그대로 실현 불가능한 상상이다. 모든 선택의 순간 가장 최상의 결과만이 존재했다면, 이라는 가정 아래 만들어진 판타지다.

그럼에도 이 아무 의미 없는 상상은 관객을 무너뜨린다. 우리 모두가 그런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잔인무도함을 이기기 위해 만약에, 라고 만번쯤 상상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매번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아름답고 아련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랬다면 우리는 행복했을까. 그럴 리 없다는 자괴감과 행복을 빌어주는 선의가 섞여 한숨이 나온다. 그 한숨의 힘을 빌려 사람들은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듯 하루를 살아간다. 라이언 고슬링의 마지막 모습처럼 말이다.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세고 다시 건반을 치자.


* 이 글은 씨네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