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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27일 06시 38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8월 27일 14시 12분 KST

올해 휴고상이 유감스러운 이유

thehugoawards.org

올해 휴고상을 중국 작품이 받아서 오오 대륙. 이제 진짜 장난 아니네. 같은 부러움에 잠시 잠겨있었는데, 조금 자세히 알아보니 그렇게 단순한 얘기만은 아니네요.

한번 정리해 놓자 싶어서 짤막하게 스토리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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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에 꽤 큰 사이즈의 SF 팬덤으로 sad puppies라는 그룹이 있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SF의 팬이고 - sad puppies 와 rabid puppies 라는 그룹을 이끄는 Vox day라는 남자는 극보수주의자에 공화당 당원, 여성에 대한 참정권을 인정하지 못한다든지, 다민족주의에 대한 다소 래디컬한 아이디어 들을 밝히는 등 좀 문제적 인물입니다.

2. 휴고상은 전통과 권위를 가진 SF 판타지 문학상입니다. 이 상은 현장에서 가입비를 내고 참가한 독자들의 투표를 통해 그 해의 우승자를 뽑습니다.

3. 올해의 휴고상은 중국작가 류츠신의 [삼체] 라는 작품입니다. 모든 SF 작가들의 꿈과도 같은 이 상을 수상한 후 작가는 한 중국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 물론 무척 기쁩니다. 하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네요. 올해는 휴고상의 60년 역사상 가장 유감스러운 한 해입니다." 라는 인터뷰를 남겼습니다. 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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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츠신 (중국 법제망 / 연합뉴스)

4. [삼체]와 함께 수상작으로 점쳐지던 작품은 여성 작가인 사라 모넷의 고블린 엠퍼러였습니다. 이 작품은 올해 로커스 상을 받은 판타지 작품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작 중 하나였습니다. 삼체와의 표차는 200표 정도.

5. 박스 데이와 퍼피즈 그룹은 여성작가들이 휴고상을 오염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룹으로 자신들의 표를 조직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그룹이 조직화한 표수는 결선투표에서 약 500표 정도 - 삼체와 고블린 엠퍼러의 표차가 200표 정도이니 수상결과를 좌지우지하기에 충분한 표수였을 것입니다.

6. 상대적으로 적은 그룹의 투표로 결선작을 결정하는 구조인 탓에 휴고상과 네뷸러상은 종종 이러한 스캔들에 노출되곤 했습니다. 사이언톨로지 교도들이 관련 작품에 투표하거나, 본인들이 미는 작품을 위해 전략 투표를 함으로써 휴고상은 애초의 취지를 상실했다는 비난에 직면했어야 했던 슬픈 과거를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올해의 경우 꽤 많은 작가들이 후보를 거부하고, 투표에서 '수상작 없음'에 투표한 팬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하네요. ( 휴고 시상식이 끝난 후 조지 마틴 경은 Hugo Losers' night 을 개최하여 '강아지들'의 작전으로 본선에 올랐지만 후보 지명을 거부한 두 명의 작가들에게 별도로 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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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삼체는 대상을 받고, (중국에서의 대 히트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에도 이미 번역본이 나와있습니다) 저 같은 애매한 팬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게 합니다. 중국 장르 문학계에서는 큰 경사겠죠. 하지만 이런 시점에 이런 걸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 와이어드의 기사에서도 얘기되는 부분이지만 SF 는 전통적으로 남자들의 장르입니다. 장르 초기의 '신'들 역시 모두 백인 남자들이었죠. 어쨌든 우리의 정치 의식과 평등 의식이 상승하고 있고 이 장르에도 많은 여성/게이/레즈비언 작가들이 유입되면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수혈하고 있습니다. 이건 좋은 일이죠. 하지만 미래를 말하고 있는 이 오래된 장르는 그만큼 오래된 장르의 컨벤션들을 갖고 있습니다. 가장 새로움을 추구할 것 같은 이 장르는 실은 장르 밖의 사람들이 거의 공유하지 못하는 꽤 단단한 방법론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건 일반적으로 이 장르의 확산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는 동시에 팬덤을 더욱 단단하게 유지시키는 이유가 되겠죠.

저는 Vox Day에 동조한 모든 사람들이 정신나간 남성우월주의자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이들은 그저 자신들이 생각하는 좋은 SF를 지키기 위해 투표를 조직화했을 수도 있죠. 그들은 단지 "여성 취향의 판타지에 질렸어." 라든지 "조안 롤링이 휴고 상을 탄 후로 휴고상도 예전 같지 않아." 라든지하는 (그럴 수 있을 만한) 불평을 주고 받았을 수도 있겠죠. 자신들이 좋아하는 장르가 예전의 모습 - 설령 그것이 현대적 기준에 다소 못 미치는 것들이라도 -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 정도로 이해 가능한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SF 작가인 듀나는 'SF가 그리는 미래가 서부극에서 그리는 서부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는 말을 트위터에 남겼습니다. 이 장르들이 꽤 일반적인 컨벤션에 기대고 있고, 모든 팬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미래/서부'의 모습을 가지고 이 장르를 대합니다. 그거 자체는 잘못된 게 아니겠지만, 우리가 과거에 만든 기준 중 어떤 것들은 지금 보기에는 다소 낡은 면이 있습니다. 이번 휴고상 당선작인 삼체의 경우에 이 작품이 가진 보수적 섹시즘이 불편하다는 평이 여기저기서 들리긴 합니다. (정말 그럴 수도 있고, 정황상 그런 면이 억울하게 과장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저는 아직 못 읽어봐서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와이어드 지의 길고 긴 글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SF 는 낡은 취향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현대 사회와 발맞춰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모든 오페라와 고전 문학의 팬들에게도 비슷하게 던져질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아래 링크는 이 사건에 대한 wired의 길고긴 아티클. 시간 많으신 분은 한번 읽어보시면 재미있습니다.

http://www.wired.com/2015/08/won-science-fictions-hugo-awards-matters/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조지 마틴 선생님의 블로그 글입니다. 아무튼 이 바닥의 대부로서 애정을 갖고 의견을 주시니 그 생각을 들을 수 있어 기쁘기도 하지만, 빨리 얼불노 쓰러 가셨으면 하는 마음도.... 으헤헷.

http://grrm.livejournal.com/4178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