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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6일 06시 06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26일 14시 12분 KST

창비스러움에 대하여 | 신경숙 표절은 어떻게 창비 권력의 문제가 되었는가

연합뉴스

지난번에 나는 「백낙청과 '창비'가 창피스럽다」는 글을 올렸었다. 거기서 나는 신경숙 표절 사태는 신경숙의 문제에서 창비의 문제로 전환되었다는 말을 하였는데,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름 아니라 바로 창비 사람들이다. 신경숙은 어쨌든 표절 문제에 대해 뒤늦게나마 사과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 시점에서 그녀의 반성을 아는 몸이 정말 자발적인 사과와 반성을 하는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또 반성에 이르게 한 정확한 원인을 따지려 들 필요도 않다. 중요한 점은, 어쨌든 그녀가 공개적으로 사과와 반성을 표현하였고 그 행동은 사회 내부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 내부'라는 것은 우선적으로 신경숙 표절 사태에 직면하여 직접 또는 간접으로 표절을 비판하였던 사람들을 포함할 것이다. 이들은 당연하지만 같은 그룹이나 조직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같은 진영이나 세력을 형성하지도 않는다. 아직도 표절에 대해 개인적으로 분노나 분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들이 한 작가를 매장시키기를 원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가 처음 터졌을 때엔 절필 수준의 반성을 원하는 사람도 있었던 듯하지만, 작가가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문제를 너무 '작가 정신' 같은 낭만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할 필요도 없다. 적절한 수준에서 자성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일단은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마치 신경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 작가를 매장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공동의 프로젝트를 꾸미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창비 사람들이다. 최근 창비 편집위원인 황정아·김종엽 교수(이하 직위호칭 생략)는 신경숙 표절 문제에 대해 글을 쓰면서 백낙청과 창비를 적극 옹호했는데, 다시 한 번 창피하다. 그런 태도는 정말 창비스러운 일이다. 중요한 점이 있다. 창비는 이제까지 신경숙만큼이나마 공개적이고 분명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창비가 그렇게 한 것처럼 착각하거나 변명하고 있다. 이제까지 창비가 내놓은 말들은 모두 애매하고 꼬리를 감추는 말들이며, 그것들이 이어지면서 궤변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에 신경숙이 사과했는데도, 아직도 신경숙 표절 사태는 불이 꺼지지 않은 채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것이다. 솔직하지 못하고 사태를 적시에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태도, 정말 창비스럽다.

그렇다면 창비는 왜 신경숙 표절 문제에 대해 신경숙만큼 공개적이고도 명확하게 사과하고 자숙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까? 창비가 그렇게 창비스럽게 굴면서 신경숙 표절 문제를 자꾸 키우는 이유는 뭘까? 표절 문제가 처음 터졌을 때 창비의 대답이 변명 수준에 그쳤던 이유는 신경숙이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아서 그랬다고 하자. 작가 본인이 표절을 부인하니 출판사도 어쩔 수 없었다고 치자. 그러나 신경숙이 사과하고 물러났는데도, 창비가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 물음은 간단하면서도, 문제의 핵심을 가리킨다. 창비 또는 백낙청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신경숙은 "「전설」을 읽고 또 읽으면서 쇠스랑이 있으면 내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었어요"라고 말했는데도, 창비와 백낙청이 그 비슷한 수준에서 사과와 반성을 못하는 이유는? 창비가 이렇게 신경숙이 있던 무대에 자신이 올라서서 공연히 불필요한 싸움을 벌이는 이유는 권력의 오만과 태만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태도가 나오기 힘들다.

문제의 초점을 흐리거나 왜곡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창비 편집위원 황정아는 아직도 여전히 의도적 표절인지 아닌지로 문제를 치환하려 한다. 물론 소설가 이응준이 표절을 고발할 때 많건 적건 작가의 의도성에 비판적으로 초점이 맞주어진 면이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표절 문제는 이내 심리적 의도보다는 텍스트 수준의 표절에 초점이 맞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글 쓰는 순간 작가 자신이 자신의 의도를 의식했는지 아닌지는 표절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다. 어떤 점에서는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더 나쁘고 위험할 수 있다. 어쨌든 표절 문제를 계속 의도성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지난 글에서 나도 말했지만, 표절 문제를 비판한 다른 비평가들(권성우·오길영 등)도 문제의 핵심은 심리적 의도성이 아니라 텍스트 차원의 표절이라는 것을 말했는데도, 창비는 여전히 의도성 여부에 매달리고 있다. 백보 양보해서, 표절 문제에 아직 해결되지 못한 미묘한 이론적 문제가 있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일단 텍스트 차원에서 표절을 깨끗하게 인정한 뒤에 미묘한 이론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곁가지 논의로 논점을 흐리면서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부인하려는 태도, 정말 창비스럽다.

창비 사람들은 또 마치 사람들이 신경숙이나 백낙청을 매장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말하는데, 바로 여기서 창비 조직의 창비스러움이 드러난다. 이들은 또 신경숙 표절 사태가 마치 집단이나 세력의 공모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여기는데, 그것도 우스운 음모론이다. 매장 운운하는 것도 권력을 너무 누린 조직으로서 그들이 지레 느끼는 불안감일 뿐이다. 김종엽은 마치 사람들이 자비심도 없이 백낙청의 모든 것을 매장하려는 것처럼 매도하는데, 그런 태도야말로 오히려 힘 있는 자가 하는 과장된 징징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창비와 백낙청이 매장되어야 한다고 했는가? 신경숙은 인정했는데도 그리고 문학동네에서도 비교적 분명한 표절 인정이 나왔는데도, 창비와 백낙청이 궤변을 늘어놓으니 비판이 높아진 것뿐이다. 신경숙과 마찬가지로, 이제까지 백낙청이 문학계에서 누린 엄청난 명예와 힘에 걸맞게 솔직하게 자숙하는 태도를 보이라는 것뿐이다. '창착과 비평'이라는 그럴듯한 제호를 가진 출판사/ 잡지가 다소 신랄한 비평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비평'을 우습게 만드는 일이다. 또 황정아는 마치 신경숙이나 창비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출구전략'을 가지고 치고 빠지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도 창비스러운 조직논리 또는 진영논리 때문에 생기는 착시현상이다. 모든 문제를 조직과 진영의 세력의 관점에서 보는 태도, 창비스럽다.

두 편집위원이 말한 것 가지고 창비의 조직과 진영논리를 언급하는 것이 과한 것일까? 처음에 창비 주간 백영서와 창비의 실질 오너인 백낙청이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 조직과 진영을 묶어 통칭하기엔 과한 면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제는 위의 창비 대표들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10월 초 편집위원들이 나섰다. 이전보다는 훨씬 조직과 진영 논리가 두드러졌지만 그래도 조직적인 진영논리가 작동하는 것일까, 라는 물음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며칠 전 이 물음에 대해 대답해줄 수 있는 상당한 증거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하게 됐다. 10월 초 창비 부설 세교연구소 임원급의 문학비평가와 며칠 여행을 같이 하게 됐던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당시 창비 핵심으로부터 그 비평가에게 창비와 백낙청을 옹호하라는 '오더'가 수차례 떨어졌다고 한다. 놀랄 일 아닌가? 아마도 그에게만 그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비 편집위원들과 세교연구소 다른 멤버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으리라고 정당하게 추측할 수 있다. 창비의 창비스러움은 처음엔 백낙청 개인의 권위주의적 성격 때문에 불거졌지만, 이젠 그 개인을 넘어 창비라는 조직이나 진영의 신뢰와 관계된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창비 편집위원들이나 세교연구소 중요멤버들도 일정한 지적-사회적 책임을 떠맡게 된 셈이다. 이들이 자신과 관계된 창비스러운 문제에 대해선 입을 싹 씻은 채 다른 비판적 발언만 한다면, 그들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작가는 사과하고 뒤로 물러났는데, 정작 창비는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조직을 지키라는 지침을 보냄으로써 소위 공부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조직원으로 여기고 있음이 드러났다. '창작과 비평' 대신에 궤변을 생산하고 '오더'를 전달하는 행태, 창비스러움으로 여겨질 것이다.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는 그들의 태도에서도 이 점이 드러난다. 김종엽은 글로벌금융 시스템에서 돌아다니는 금액과 비교하면 아주 작은 금액밖에 가지지 못한 판인데 뭐 권력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한다(문학동네 편집위원인 귄희철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 말도 문학권력 논의의 핵심을 흐리거나 의도적으로 비껴가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권력이라고 지칭된 집단에 속하지 않는 작가가 그런 말을 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논의의 직접 대상이 되는 출판사와 잡지의 편집위원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솔직하지도 않고 지적으로 게으르다고 할 수 있다. 논의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이제까지 문학 출판사가 잡지를 내며 비평가들을 내세워 자신들이 출간한 책을 칭찬하게 하고 또 거기 덧붙여 과도한 광고를 해 왔다는 것이다. 이 점을 쏙 빼놓고 문학 매출액이 얼마 되지 않는데 무슨 권력이냐고 반문한다면, 둔하거나 교묘한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미 사람들이 읽는 전체 책의 양이 줄어든 시장에서 소수 작가에 지나치게 쏠린 광고는 다른 작가들의 생존까지 위협하며 문학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태이다. 일반적으로는 생태 문제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왜 정작 '문학 생태계'는 외면하는가? 더욱이 바로 창비도 인정하듯이, 문학시장이 줄어든 판국 아닌가?

문학권력 논의에서 또 다른 핵심이 흔히 주례사 비평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 자신도 과거에 주례사비평을 비판하는 책의 공저자로 참여하기도 했지만, 가만히 보면 그 말은 비평가의 지적 게으름과 허세 그리고 일정한 사회적 컨텍스트를 지적하는 데에는 꽤 적절하지만, 문학이 권력과 자본을 통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는가를 분석하는 데에는 아주 적절하지는 않은 듯하다. '주례사비평'은, 다소 단순화하자면, 비평이 자신의 대상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으며 비평적 이익과 힘을 축적하는 행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달리, 문학이 권력/자본과 결합하는 메커니즘 속에서 비평가들은 흔히 말하듯 단순히 주례사 수준의 비평을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문학권력의 틀 안에서 비평가들은 출판사의 이익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비평적 권위를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력 언론에 실리는 광고에 비평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칭찬 부풀리기 기능을 수행하곤 한다. 그 경우 비평가는 주례사를 늘어놓기보다는 요란한 호객행위를 하는 삐끼 노릇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주례사 비평보다는 차라리 삐끼 비평이 맞는 말일 터이다. 그리고 그런 비평은 결국 문학을 구차하게, 아주 구차하게 만들 것이다. 문학자본의 문제도 문학을 단순히 상품으로 만드는 문제가 아니다. 문학도 일정한 정도로 상품이고, 그것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다만 독자가 비교적 자발적인 방식으로 책을 구매한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비평이 문학 생태를 깨트리는 요란한 호객행위를 하고, 그 결과 독자의 책 구매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 때 이미 문학은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문학이 사리진 마당이라면, 문학비평가가 더 이상 무슨 소용인가?

물론 문학권력에 대한 초기 논의에서 권력문제가 다소 단순화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무릇 논쟁이나 싸움이 일단 벌어지면, 단순한 면이 여러 이유로 부각되기 쉽듯이 말이다. 어쨌든 문학권력 문제에서 핵심은 창비를 비롯한 몇몇 출판사가 단순히 권력이라는 데 있지 않다. 권력과 자본을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그것들 자체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느냐, 그리고 그 권력이 실행되는 방식이 문학판에 참여하는 작가 다수에게 비교적 합리적이거나 정당하거나 또는 타당하다고 여겨지느냐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창비는, 다른 물음은 옆으로 밀어놓더라도, 지금 표절 사태와 관련해서 적절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저항을 공연히 불러모으고 있다. 창비, 자신이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권력인 듯 자만하며 자신의 진영 안에서 꾸물거리지 말라. 사람들이 그렇지도 않은데 창비를 문학권력으로 괜히 부를까? 오히려 창비 자신이 자신의 태도를 통해 스스로를 문학권력으로 만들고 있고, 스스로를 문학권력 비판의 타겟으로 만들고 있다. 창비스러운 짓을 반복하는 창비, 정말 창피하다. 그 혼자만 창피스럽게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창피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아직 시간이 있다. 국정교과서 논란을 자초한 대통령처럼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사람들의 중요한 시간을 쓸 데 없는 일에 더 이상 낭비하게 하지 말라.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로움을 보여주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창작과 비평'은 기껏해야 '창작과 광고' 또는 심지어 '창작과 궤변'이 될 것이다.



* 본문 일곱 번째 단락 <10월 초 창비 부설 세교연구소 임원급의 문학비평가와 며칠 여행을 같이 하게 됐던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당시 창비 핵심으로부터 그 비평가에게 창비와 백낙청을 옹호하라는 '오더'가 수차례 떨어졌다고 한다.>와 관련, 해당 문학비평가는 ‘오더’가 아닌 ‘청탁’이라고 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