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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4월 04일 05시 48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6월 04일 14시 12분 KST

이별통보 앞에서 살아남기

예기치 않은 이별통보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몇 가지 기이한 행동을 하곤 한다. 가장 쉽고 편리하게 시작해 보는 일은 부정. 그 사람이 나를 버릴 리가 없고 단순히 화가 난 상태이니 늘 그랬듯 사과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면 다 괜찮아질 것이라 믿는다. 부정의 단계를 지나 '아! 내가 정말 차인거구나!'를 머릿속에 탑재하고 나면 분노가 치민다.

영화 '환상속의 그대'

예기치 않은 이별통보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몇 가지 기이한 행동을 하곤 한다.

가장 쉽고 편리하게 시작해 보는 일은 부정. 그 사람이 나를 버릴 리가 없고 단순히 화가 난 상태이니 늘 그랬듯 사과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면 다 괜찮아질 것이라 믿는다. 일상을 가장해 전화 걸어 소위 말하는 진상을 부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헤어진 게 이해가 안 되서 그러는데...' 로 시작해서 '근데 내가 왜 싫어졌다고 했었지? 갑자기 나한테 왜 질린거야?' 라는 하나마나한 질문을 연거푸 던지고 나면 수화기 너머로 그 사람의 절망적인 긴 한숨소리가 전해온다. 적막을 깨고 '니가 이러는 게 질린다고. 제발 그만하자. 전화 이제 안 받을게'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만큼 친절한 '나 너 찬거임'을 확인하고서야 상황 파악이 된다.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구나.' 이때는 다행히 누가 봐도 안타까운 시기라 주변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시간을 함께 해준다.

부정의 단계를 지나 '아! 내가 정말 차인거구나!'를 머릿속에 탑재하고 나면 분노가 치민다.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지는 뭐가 잘났다고!' 이 시기에는 놀랍게도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힘이 솟는다. 전 단계에서 식음을 잠시 전폐했던 사람도 이 단계로 오면 입맛이 돈다. 컨디션도 최상. 어떤 적이라도 무찌를 수 있을 것 같다. 에너지 이상으로 갑자기 눈물이 터지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분노로 승화 시킨다. '감히 니가 날 울렸어!' 이때는 상대의 집이나 회사로 찾아가 행패를 부릴 위험이 크다. 진상을 넘어서는 더러운 꼴을 제일 많이 보이고 또 보게 된다. 주변에 이 단계의 사람이 있다면 사지를 잡아두자. 행동의 제약이 급선무다.

주변인들이 분노의 모든 꼬라지를 목격하고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때 즈음, 당혹스럽게도 타협의 단계가 온다. '우리 정말 헤어졌나봐, 나 이제 어쩌냐, 그래도 걔는 행복했음 좋겠어' 급작스레 이별을 수용하고 무려 그 사람의 안녕을 빌어주는 모습에 주변인들은 안도감을 느낀다. '너는 잘 이겨낼 줄 알았어.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야.' 하나 둘 각자의 공간으로 떠나는 친구들을 배웅하고 익숙한 집으로 돌아오면 자기혐오와 자학이 고개를 쳐든다. '나는 차였다. 나는 질리는 스타일이다. 나는 사랑받을 주제가 안 된다' 최면을 걸 듯 근면히, 입체적으로 스스로를 괴롭힌다. 당신이 이 시기라면 부디 집 밖으로 뛰어나오시길. 그리고 당신 때문에 지쳐버린 불쌍한 주변 친구들을 다시 찾으시길. 혼자 있으면 정말 위험하다.

형사 처벌이나 격리 수용 없이 위 단계를 견디어 냈다면 이제 끝판왕 절망의 쓰나미를 만날 시간이다. 이때는 고유명사들이 모두 상실되고 대명사와 형용사만 남는 생각의 연결이 끝도 없이 계속된다. '힘들다. 끔찍하네. 슬프다' 정말 위험하게는 '죽고 싶다' 안타깝게도 호의적인 주변인이나 아름다운 자연도 이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냥 맨몸으로 맞닥뜨리는 수밖에 없다. 외롭고도 괴로운 싸움이다. 호되게 몸이 아프면 차라리 좋은데 건강한 체질이라면 육체적 고통이 수반되는 감정적 고통의 끝점을 맛본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 파괴를 홀로 목도해야만 한다.

겨울 끝에 봄이 오듯, 그래도 천천히 나아는 진다. 어떤 식으로든 살기 위해, 우리는 이별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비순차적이고 반복적으로 이 과정들을 용감히 겪어내고 나면 한참 후, 그 사람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그런 괜찮은 날이 온다. 그 날이 온다면 너덜너덜해진 자기를 좀 안아주자.

열거된 단계들은 퀴블러로스의 사망단계(Kubler-Ross death stages)를 참고한 것이다. 심리학자 퀴블러로스가 시한부를 선고받은 환자를 대상으로 인터뷰하여 임박한 죽음에 대한 심리학적 반응을 정리한 위 단계들은 사랑했던 연인의 이별통보를 받아들이는 과정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우리는 더 힘들 상황에 대비해 여지를 남기고 힘들어하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매번, 죽을 것 같이 힘들다.

<환상속의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이별통보 앞에서 각기 다른 단계를 겪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죽어버리는 사랑스러운 성차경(한예리)은 김혁근(이희준)의 연인이자 원기옥(이영진)의 절친이고 성주경(최은아)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다. 그녀의 죽음은 남겨진 세 사람에게 모든 것이 무너지는 폐허를 맛보게 한다. 이 폐허 속에서 혁근은 지난한 부정의 단계를 지나고 기옥은 분노의 단계를, 주경은 타협의 단계를 막 지나는 중이다. 고통이 비교급이 될 수는 없을진데 누가 제일 힘드나 내기를 하듯 서로가 서로를 공격한다. 주경은 기옥을 찾으며 죄를 묻는다. 동생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임을 주경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상황은 누군가의 잘못이어야만 하고 그 가해자가 원기옥이기를 바란다. 이런 주경의 네거티브 기운을 받은 기옥은 '짝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채 분노 에너지를 혁근에게 던진다. 소극적이고 말이 없어 부정의 시간을 빠져나올 도리가 없어 보이는 혁근은 기옥의 분노 에너지에 변화하기 시작한다. 환상 속에서 맛보는 행복은 허상임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공격할 수 있어서 참말로 다행이다. 기옥에게 주경이 없었더라면, 혁근에게 기옥이 없었더라면 이 세 사람의 혼자 된 시간이 훨씬 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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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매거진M'에 실린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