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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2월 10일 08시 38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2월 10일 14시 12분 KST

'연애 고자'는 없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

언제부턴가 '고자'라는 말이 아무 음식에나 일단 끼얹고 보는 치즈처럼 넘쳐난다. 원래 '고자'의 사전적 의미는 '생식기관이 불완전한 남자'로, 궁중에서 임금의 시중을 드는 거세된 남자, 즉 내시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을 넘어서, 무능하거나 서툰 것이면 어디든 '고자'가 붙는다. 티케팅에 실패한 아이돌 팬들은 '손 고자'라고 오열하며, '셀카'를 예쁘게 못 찍으면 '셀카 고자'가 된다. 그중 압도적인 용례는 단연 '연애 고자'다. 연애 경험이 없는 '모태 솔로'나 연애에 서툰 이들을 놀리거나, 당사자들이 자조할 때 자주 쓰인다.

이 구분에 따르면 나 역시 '연애 고자'일 것이다. 내 삶은 연애 쪽으로는 T. S. 엘리엇의 뺨을 치는 황무지이고, 덕분에 이렇게 비연애 칼럼니스트로 입에 풀칠이나마 하고 산다. 연애는 언제나 나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 나는 이성적으로 크게 매력을 끄는 타입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한 발이라도 걸쳐보려면 기를 쓰고 노력해야 했다. 가만히 있어도 원하는 대상이 자석처럼 끌려오는 인간이 아니라면 연애에는 이런 식의 몇 가지 '노동'이 필수적이다. TV, 책, 인터넷, 주변 사람들의 참견 등에서 연애의 '꿀팁'은 넘쳐나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깔끔한 위생 상태와 무난한 옷차림, 맥락 없는 거친 말은 주의할 것, 사소한 점을 칭찬하기, 상대의 말을 잘 듣고 호응해주기 등.

그런데 이것은 꼭 연애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인간관계 자체에서 필요한 기본 예의범절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이런 기본 예의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과 만나주지 않는 환상 속의 그대를 욕하고 증오하는 이가 많다. 혹은 연애의 가능성이 있을 때는 그나마 성의를 보이다가, 상대에게서 건질 것이 없다고 판단한 순간(애인이 있거나/ 결혼했거나/ 구애를 거절하거나) 돌변해 욕설을 퍼붓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 사람들은 '연애 고자'라기보다는 대인관계나 성격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연애 고자'는 이런 룰을 모두 깍듯하게 지켰음에도, 연애 앞에만 서면 아이스링크장에 올라온 미식축구 선수처럼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나는 상대방과 연애의 가능성이 있든 없든, 이성이든 동성이든 일관적인 태도와 평균적인 예의범절을 고수한다. 처음 본 이성과도 쉽게 대화를 나누며 친해질 수 있다. 그러다보면 나는 어느새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의 친구처럼, 남자들이 '징검다리'로 경유하는 지인 A가 되곤 했다. 뜻대로 되지 않을 때면 속상한 순간도 있었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연애의 대상은 아니지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사람으로 신뢰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는 인간의 특성이고, 내가 강점을 발휘하는 관계성이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한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연애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누군가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그 관계에 능란할 수 있고, 누군가는 애를 써도 번번이 실패할 수 있다. 사람마다 관계에 대한 '스탯'은 다르기 때문이다. 연애는 잘하지만 아이나 연장자를 대할 때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고, 처음 본 사람 100명에게 99개의 옥매트를 파는 능력자가 이성과의 1 대 1 대화에서 쩔쩔매기도 한다. 모두가 달걀을 완벽하게 반숙으로 익힐 수는 없는 것처럼, 모두가 연애의 고수이기도 힘들다.

연애는 다양한 상황과 조건, 사람 간의 '케미스트리'에 따라 요동치는 관계다. 매뉴얼은 때때로 놀라울 만큼 무의미하다. 세상에는 별의별 커플이 다 있어서, 앞서 말한 기본적인 예의범절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도 연애를 하거나 똑같은 사람이 만나는 사람에 따라 갑자기 '연애 고자'를 탈출하기도 한다. 그러니 '고자'처럼 최종적이고 불가변한 '불능' 상태를 내포하는 단어는 '연애'처럼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관계와 접붙이기에는 영 맞춤하지 않는다.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연애 고자'지만, 그럼에도 뻔뻔하게 말할 것이다. '연애 고자'는 없다고.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