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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1월 10일 08시 27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1월 10일 14시 12분 KST

맨정신으론 왜 안 돼?

상대가 취했다고 동의 없이, 혹은 정신은 차리고 있는데 몸을 가누지 못할 때 혼자 멋대로 '뜨거운 밤'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썸도 데이트도 아니다. 그냥 엄연한 범죄다. 맨정신으로 정정당당하게 좀 하자. 못하겠거든 안 하면 된다. 이렇듯 술에 대한 사람들의 호불호나 태도, 꿍꿍이(!)는 다 천차만별이기 마련인데, 꼭 연애에 술이 필요하다면... 그냥 필요 없다고 전해라~.

[연애하지 않을 자유]

얼마 전 기획재정부는 '술자리 예절'이랍시고 "어른에게 술을 받을 때나 따를 때는 두 손을 이용" "술을 못 마셔도 첫 잔은 예의상 받기" 등을 제시하고 나섰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술문화와 넘치는 꼰대력에 대한 반발이랄까.

나는 술을 못 마신다. "예의상 받은" 첫 잔만으로 독개구리로 변신할 수 있고, 좀더 마시면 온몸이 아프다. 그러다보니 한 번도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칠 때까지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차라리 잘됐다 싶다. 애초에 술을 싫어하니까.

하지만 이런 특성을 존중해주는 몇몇 모임을 빼면, 술을 못 마신다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한 일이다. 술은 마시면 는다는 둥, 안 마시면 재미가 없다는 둥, 딱 봐도 말술인데 빼지 말라는 둥. 그래서 이십 대 초반에는 다음날의 근육통까지 감수하고 독개구리 변신 과정을 손수 보여줘야만 (으악 쟤 종아리까지 울긋불긋해!)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넘나 예상 가능한' 참견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그러니까(술을 못 마시니까) 연애를 못하지."

미팅은 시작부터, 소개팅은 마지막이 결국 술자리였다. '썸'을 탈 때도 뭔가 진도가 나갈라치면 술이 등장했다. 일정한 속도로 다 함께 알딸딸해져야 하는 미팅에서 나는 늘 초반부터 낙오하는 루저, 외톨이였다. 마시자마자 독개구리로 변신하거나 구석에서 엎드려 있다가, 남들 다 제정신 아닐 때 혼자 깨어나 "뭐야 얘들 왜 이래?" 하고 두리번거렸으니까.

술 한 방울 안 먹고도 흥겹게 잘 놀지만 그런 자리에서 기대되는 것은 살짝 술에 취해서 피어오르는 오묘한 무언가였다. 상대방에 대한 경계심도 좀 풀리고, 오직 술자리에서만 가능한 수작으로 감정의 보폭이 성큼성큼 넓어지고, 확고한 취향이 허물어져 이 정도면 제 눈에 안경쯤 되는 것 같은 뭐 그런 핑크빛 기류. 밥 먹고 커피 마실 때는 서로 눈치만 보다가, 술잔을 앞에 두고서는 대담해지는 분위기 말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술자리는 연애 다발 지역이다. 그래서 나도 어느 정도 마음이 있을 때는 일단 쫄랑쫄랑 따라갔다. 저도수 칵테일이나 맥주 500cc 한 잔을 3시간에 걸쳐 마시면서도, 그러한 흐름에 동참하려고 노력했다. 그때의 나는 '예절'과 '눈치'를 모르는, 그래서 연애가 불가능하다고 진단받는 목석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누가 봐도 맨정신인 나와 취한 상대방은 삐걱거리거나, 혼자 말짱한 나를 보고 어색해하다가 어색 대잔치로 종결되거나.... 물론 술을 못 마시는 것이 100% 파투의 원인은 아니지만, 남들은 술 안 마셔도 연애 잘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적하듯 나에게는 술자리에서 기대할 만한 게 전혀 없는 셈이다. 하지만 이 '기대할 만한 것'에 나는 영 부정적이다. 심지어 취한 척하라는 조언까지 따라붙으면 배알이 배배 꼬일 수밖에. 뭘 기대해? 맨정신으론 못하냐?

때때로 술자리에서 나는 다른 테이블에서 일행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까지 술을 먹이는 모습을 보며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최근에야 술이나 약물을 이용한 데이트 강간이 비로소 범죄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여자가 만취하거나 술이나 음료에 약 탄 것을 먹고 항거불능 상태가 되었을 때 성관계를 하는 것은 일종의 이벤트이자, 간편하게 진도를 빼는 속성 코스로까지 여겨졌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자를 부축해서 숙박업소로 사라지는 장면 같은 것들은 미디어에서도 무분별하게 나올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하지만 상대가 취했다고 동의 없이, 혹은 정신은 차리고 있는데 몸을 가누지 못할 때 혼자 멋대로 '뜨거운 밤'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썸도 데이트도 아니다. 그냥 엄연한 범죄다. 맨정신으로 정정당당하게 좀 하자. 못하겠거든 안 하면 된다. 이렇듯 술에 대한 사람들의 호불호나 태도, 꿍꿍이(!)는 다 천차만별이기 마련인데, 꼭 연애에 술이 필요하다면... 그냥 필요 없다고 전해라~.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