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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7일 10시 00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2월 27일 14시 12분 KST

'기승전파스타'를 견디기 싫다면

[연애하지 않을 자유]

"그 사람이 좋아 못 견딜 것 같아서 시작한 게 아니라면, 연애라는 관계에는 그렇게 다양한 욕망이 투사되기 마련이다."

20살, 갓 대학에 입학한 나는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었다. '대학에만 가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거라는 사탕발림에 속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대학에 가면' 연애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진짜였으니.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동아리 언니의 한마디. "너, 무성애자 라인의 후계자가 돼라!" 무성애자 라인이란 동아리에서 나름대로 유서 깊게 이어져온 계보로 누구와도 연애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참 귀신 같은 일이다. 이마 위에 번개 모양 흉터가 있는 것도, 배꼽에 나선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그 언니는 내가 훗날 무성애자 라인의 끝판왕임을 알아봤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것을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평생 싱글이 돼라!"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우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악담이다. 나는 언니의 예언이 틀렸음을 증명하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다행히 대학 신입생은 연애 시장의 핫 매물이어서, 미팅과 소개팅 급행열차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올라탔다. 그때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파스타, 오, 파스타, 파슷...하! 지금이야 메뉴가 다양해지고 소개팅 방식도 다채로워졌지만, 그 무렵엔 그냥 기승전파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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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적당한 분위기, 적당한 가격, 적당한 위치, 적당한 맛의 식당에는, 짐작할 수 있겠지만, 몇 테이블 건너 연애의 장에 나선 이들이 있다. 그들은 누가 봐도 소개팅 중이거나, 이제 두 번째 만나는 중이며, 공기가 참 어색하고 민망하고 어딘가 연극적이고 그렇다. 그들은 서로를 치열하게 탐색하는 중이며, 공작새가 꼬리를 접었다 폈다 하듯이 회심의 매력 발산을 언제 할 것인지 간 보는 중이며, 혹은 언제 도망가야 적당할지 눈치를 보는 중이다. 어느 날 그런 내 모습이 '트루먼쇼'처럼 느껴졌고, '연애'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려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같은 행동을 처음인 양 반복하는 것에 흥미가 떨어졌다. 그때부터 나는 소개팅과 미팅 등을 중단했다. '파스타비우스'의 띠 바깥으로 튕겨져나온 것이다. 그렇게 연애를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그만두면서 평화로운 싱글 라이프가 시작됐다. 물론 급하게 먹는 밥이 체한다고, 좋다니까 무작정 만났다가 덴 경험도 이러한 선택에 기여했지만? 부처님 좋아한다고 했다가 차여본 사람 '푸처핸접'!

사실 스무 살의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연애 가능성이 없는 '좋은 사람'보다 연애라는 형식을 택했다. 왜냐하면 연애가 약속하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연애는 단순히 두 사람만의 특별한 관계로만 수렴되지 않는다. 그때의 나에게 연애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중 체크카드와 신분증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세련된, 어른의 지표였다. 나는 그것이 갖고 싶었다. 한편 연애는 친밀한 관계의 지원군을 얻을 기회이자, 청소년기까지는 함부로 발산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꽁꽁 감추어야 하는 매력 자본을 검증받는 쇼케이스이고, 도처에 널린 연애 관련 발화에 부담 없이 끼어들 수 있는 초대장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아를 꾸미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좋아 못 견딜 것 같아서 시작한 게 아니라면, 연애라는 관계에는 그렇게 다양한 욕망이 투사되기 마련이다.

오늘도 서울 신촌역 3번 출구 앞 맥도날드 앞에는 무수한 사람이 목을 빼고 서성이며 자신의 임이 될지도 모르는 남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많은 파스타는 여전히 누군가 '후드릅 짭짭' 맛있게 먹어치우는 중일 것이다. 자신이 연애에 기대하는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그리고 나는, 그때의 입맛을 살려 그럭저럭 괜찮은 파스타를 만들면서 무성애자 라인의 또 다른 후계자를 찾는 중이다. 이제는 언니가 어떻게 나를 알아봤는지 알 것도 같다. 전체적으로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