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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21일 07시 46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9월 21일 14시 12분 KST

귀족이냐 평민이냐

Gettyimagesbank

1.

정치는 갈등이다. 어떤 집단과 집단이 무슨 주제로 갈등하고 있느냐를 파악하면 정치적 구도가 그려진다. 유행어가 된지 10여년 만에 시쳇말이 되어버린 '프레임'도 결국 그런 맥락에서 쓰이고 있다. 조지 레이코프가 제시한 언어심리학적 개념의 섬세한 학술적 맥락과 달리, 현재 한국에서는 누가 누구와 왜 싸우고 있는지를 단번에 설명해줄 수 있는 그 어떤 개념으로 '프레임'이라는 단어가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가깝게 잡아도 2007년 대선부터 야권은 늘 지고 있다. 대선에서 두 차례나 패배했고, 총선에서도 다수석을 점해본 적이 없다. 시계를 조금 더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1997년, 2002년의 대선 승리는 주기적인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의 시작이 아니라 역사적 예외로 기록될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많은 이들이 시달린다. 현재의 야권이 의회에서 다수를 점한 것은 오직 17대 총선에서만 가능했었고, 그 총선은 다들 기억하고 있다시피 탄핵 역풍 속에 치뤄진 '비상선거'였다.

요컨대 야권은 늘 불리한 상황 속에 처해 있었고, 최근에도 늘 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각에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개념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쭉, 계속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그것은 마치 지형지물처럼 주어진 환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야권이 패배하면 운동장이 기울어진 탓이라는데, 입장을 바꿔서 국민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야권의 브레인 내지는 빅마우스라는 사람들이 '우리가 패배한 것은 원래 환경이 그래서 그렇습니다'라고 웅얼거리고 있는 꼴이다.

'프레임'을 바꿔야 이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작 현실을 설명할 때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프레임을 퍼뜨리고 있는 이 웃기지도 않는 상황. 전통적인 야권 지지층이 실망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도가 20퍼센트 대에서 맴도는 것도, 야당의 구성원들끼리 총선과 대선의 승리라는 단일한 목적 의식 하에 단결하여 일관된 지도 체제를 구성하지 못하는 것도, 이미 담론이 오가는 내용과 수준만 놓고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타령을 하며 국민들에게 징징거리고, '20대 개새끼론'을 들먹이며 본디 야권 지지 성향이 높은 청년층에게 표 내놓으라고 반 협박을 해서 도리어 심정적 지지도를 갉아먹고, 이중 삼중의 억압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투표장으로 이끌고 지지층으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기는커녕 '아줌마들이 몰표를 줘서 박근혜가 당선되었다'는 여성혐오적 인식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 야권에게 과연 미래는 있을까. 수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매우 부정적이다.


2.

다시 한 번 말해보자. 정치는 갈등이다. 이것은 나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정치학의 거장 E. E. 샤츠슈나이더의 통찰이다. 정치는 갈등의 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긋고 지지자를 확보하는 게임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갈등의 선이 불리하게 그어져 있는 한, 미시적인 노력으로는 그 한계를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령 지금까지 '지역감정'이라는 말로 호도되어 온 호남혐오, 호남포위 전략에 대해 생각해보자. 군사정권과 그들로부터 기원을 두고 있는 정치 세력은 위협적인 대선 후보 김대중을 눌러앉히기 위해 끝없이 그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동시에 그의 지지 기반인 호남을 고립시키는 데 주력했다. 누군가 김대중을 지지한다면 그는 호남 사람이다, 이렇게 김대중이라는 개인과 호남을 1:1로 결부시킴으로써, 김대중을 둘러싼 갈등을 '호남 대 비호남'으로 축소시켜버린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김대중이 어떤 새로운 정치적 갈등의 선을 제안하건, 그것을 빨갱이 아니면 호남이라는 두 개의 타자화된 개념틀에 포박지어 버림으로써 그를 1997년까지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한 전략은 현재 '친노 대 비노'라는 구도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나중 문제고, 일단 그가 '친노'라고 분류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갈등의 선이 그어진다. 야권 내의 정치인을 '친노'와 '비노'로 분류하고 있으니, 당연히 갈등은 노무현이라는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을 중심으로 그어질 수밖에 없다. 비극적인 것은 노무현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따라서 그는 자신을 기준선으로 그어진 갈등을 극복하거나 재설정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끝없이 갈등의 선으로 제시되며, 사실상 학대당하고 있다.

야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더 나아가 다가올 총선과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 혹은 지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며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고민은 좀 더 근본적인 곳을 향해야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갈등은 어디에 있는가?


3.

현재 야권은 철 지난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매달려 있다. 이미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주의의 형식이 만들어진 나라에서, 20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민주 대 반민주'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대선도 그래서 졌다. 정치인 박근혜의 가장 큰 자산이자 부채는 그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더 이상 '갈등'으로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야권에서는 그 구도가 여전히 통용된다고 믿었고, 특히 이제는 50대에 접어든 386 세대 사이에서 그러한 믿음이 팽배했던 것 같다.

그들은 군사독재를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20대를 향해 '너희가 문재인을 찍지 않는다면 그것은 군사 독재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협박했다. 20대는 꾸역꾸역 선거장에 나가 야당에 많은 표를 몰아주었지만, 정작 386들은 자신들의 동년배가 경제적 이유로, 혹은 잘난척하는 386들을 더는 참아주기 싫다는 이유로 도리어 박근혜에게 몰표를 주는 것을 막지 못했다.

2012년 대선 결과를 유심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50대 이상에서 박근혜에게 몰표가 쏟아졌기 때문에 진 것이다. 그들은 숫자도 많고 표 결집도도 높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민주 대 반민주'라는 갈등은 거의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386들은 고장난 축음기처럼 '민주 대 반민주' 구도만 붙들었고, 영남 득표에 올인하더니, 졌다.

대선 패배 이후 야당이 몇 번의 구조적, 혹은 명칭에서의 변화를 겪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갈등의 구조를 업데이트하지 않은 것이다. 흔히 '친노'라고 부르는 세력은, 선거에서 졌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신앙 체계인 '민주 대 반민주'를 버리지 못한다. '비노'라고 부르는 세력은 심지어 그 정도의 이념적 틀거리도 갖추지 못한 채 현 지도부에 대한 불만을 간헐적으로 드러내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되겠지만, 정치는 갈등이다. 새로운 갈등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새로운 정치도 있을 수 없다. 안철수의 새정치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막연한 행복과 개혁을 약속하지만, 정작 한국 사회에서 당장 맞서 싸워야 할 핵심적인 갈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은 듯하다. 안철수 현상이 대선 직후 시들어버리고 만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새로운 정치는 새로운 갈등의 설정이어야만 한다.


4.

그렇다면 여권의 핵심적인 갈등은 어디에 있을까? 야당 성향의 지지자들은 '자유민주주의 대 공산주의' 같은 말을 얼른 꺼내들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들이 '빨갱이' 낙인 찍기로 압축되는 그러한 갈등 구도를 지금까지 즐겨 사용해왔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그러한 구도는 더 이상 현실적으로 성립하지도 않거니와, 애초에 '빨갱이 딱지 붙이기'는 부정적인 방향에서의 선 긋기를 가능하게 할 뿐 어떤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갈등을 창출해내지 못한다.

선진국 대 후진국. 그것이 지금까지 여권에서 국민 일반을 설득하기 위해 제시해온 가장 근본적인 갈등의 축이다. 보수 정당 중 하나의 이름이 '자유선진당'이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새누리당이라는 이름부터가 이미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를 새로운 어떤 차원으로 이끈다', 다시 말해 선진화시킨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후진국이 되지 말자, 가난에서 벗어나자, 경제를 발전시키자, 그렇게 선진국이 되자. 이것은 5.16 쿠데타 이후 군부와 신군부의 교체를 거치고, 3당 합당으로 입당한 김영삼이 당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되면서까지도 바뀌지 않은, 여권의 핵심 갈등이다. 지금까지 야당보다는 여당이 정치적 논의를 주도해왔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결국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는 개발독재 시대를 넘어 아주 최근까지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핵심 갈등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해방 직후 해외 원조에 의존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해외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가 된 것은, 그만큼 선진국 대 후진국의 대립 구도가 국민 전체의 뇌리에 강하게 자리잡아, 최선의 결과를 뽑아낼 수 있는 긍정적 갈등으로 기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오늘날 그 갈등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이 되었지만, 과연 우리가 '선진국 대 후진국'의 갈등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따라서 그 갈등이 극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진국 대 후진국'의 구도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유효하다고 할 수도 없다. 분명 우리는 잘 살게 되었고, 이제는 선거로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며, 심지어 국회마저도 '선진화' 되었으니 말이다.

선진국이 되어야겠다는 열망은 사라졌지만 개별적인 경제 주체들의 탐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나라가 모두 함께 더 잘 사는 나라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선진국의 꿈'은, 어느덧 남들이야 망하건 말건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각자도생의 꿈'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다.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가 힘을 잃었지만, 그것을 대체할 만한 전 국민적 도전 과제가 새롭게 제시되지는 않은 지금, 대한민국은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며 그저 표류하고 있다.


5.

한국 사회의 이상을 새롭게 설정하는 것,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다시 짜는 것은, 결국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갈등을 재정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1인당 국민 소득 2만불을 넘긴 나라, 평균 출산률이 세계 최하위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 국민들이 밤낮 없이 일하지만 극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한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나라. 이 나라의 갈등은 어디에 있을까?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은 '귀족이냐, 평민이냐'의 갈등을 겪고 있다. 소수의 '귀족'들이 그들의 '가족'을 위해 국가 전체의 이익을 해치면서 호의호식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느냐, 아니면 절대 다수의 '평민'들이 틀을 깨고 연합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공정한 대우를 받고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위대한 평민의 나라'로 향하느냐의 갈림길이다.

최근 언론에서 주목하고 있는 젊은이들 사이의 유행어를 떠올려보자. '금수저'가 있고 '흙수저'가 있다. 앞으로 이 나라에서 수십년 더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의 눈에는 곧장 보이는 것이다. '상속받을 유무형의 재산이 있는 자'와 '부모로부터 빚이나 잔뜩 물려받지 않으면 다행인 자'의 인생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당신들이 함부로 순진하다고 치부하며 계도하려 드는 젊은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이다.

'헬조센'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최근 언론에서 그 단어를 거론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은 섣불리 현실 속에서 절망하는 젊은이들을 꾸짖느라 바쁜 것 같다. 하지만 그 내용은 결국 인생의 문제를 부모와 조부모의 선에서 해결하지 못한 채 태어난 평민 청년들의 울부짖음이다. 왜 그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대한민국에 살면서 '헬대한'이 아니라 '헬조선'이라고 말하는가? 젊은이들이 경험한 바, 이 나라는 신분제 조선에 더욱 가까운 무언가로, 다시 말해 양반이라는 특권 귀족 계층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그 수준으로 굴러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젊은이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헬조선'을 외치는 젊은이들에게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는 그저 공허하게만 들릴 뿐이다. 이 나라가 아무리 '선진국'이 된다 한들 그 과실이 자신에게 돌아올 리 없다는, 남들은 행복하겠지만 자신은 끝없이 늘어나는 노동 시간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는데, 선진국 타령이 말 같은 소리로 들리겠는가?

게다가 오늘날의 청년들은 성장기에 2002년 월드컵을 일종의 원체험으로 경험했고, 전 세계인들이 케이팝을 듣고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될지 말지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더 선진국이 된다 한들 자신에게 떨어질 이득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청년 세대가 볼 때 대한민국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충분히 선진국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선진국의 작동 방식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져 있을 뿐이다.

귀족이냐 평민이냐. 오직 이 갈등만이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지닌다.


6.

현존하는 정치적 갈등을 귀족과 평민의 갈등으로 재편하는 것은 야권에도 한 가닥의 희망을 안겨준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기울어졌다고 불평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운동장을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물론 새누리당도 선거를 앞두고 '서민'을 위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야권보다 좀 더 왼쪽에서는 '민중'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 세력이 존재한다. '서민'이나 '민중'은 그러나, 그에 대립하는 개념이 없는, 정치적으로 오작동하기 딱 좋은 개념이다. 그것은 정치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신학적 개념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하겠다.

생각해보자. '서민'의 반댓말은 무엇인가? '중산층'인가? 아니다. '서민과 중산층'은 마치 짜장면과 짬뽕처럼 한 세트로 취급될 뿐 서로 대립하지는 않는다. 둘 다 모든 정치 세력이 앞장서서 지켜줘야 할 누군가이며, 더 많은 연말정산 환급을 받아야 하고, 온갖 종류의 지원을 받아야 하며,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할 시혜자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언어 속에는 '서민과 중산층' 바깥의 그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친서민 정당'은 아무나 할 수 있다. '반서민 정당'을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민들의 이익'은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가 돌아와도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 된다. 그러므로 선거를 앞두고는 좋은 말을 아무 것이나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서민을 위해, 중산층을 위해.

그 결과 진정한 정치적 갈등은 실종되어 버렸다. 2012년 대선을 돌이켜보자. 여당과 야당의 경제 공약이 거기서 거기였다. 야당의 지지자들은 '어차피 저들은 실천하려는 진정성도 없이 공약을 마구 베꼈다'라고 불평한다. 하지만 애초에 공약을 '베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만약 야당의 공약이 진정으로 올바른 갈등을 설정하고, 자신들의 지지자들에게 올바른 혜택을 가져다주며 갈등선 너머에 있는 세력에게 불이익을 주도록 만들어져 있었다면, 그런 공약은 절대 도둑질당할 수 없다. 여당이 야당의 경제 공약을 베낀 게 아니라, 야당이 여당의 경제 공약을 대신 써준 셈이다. 어차피 양당 모두 한국 사회의 갈등을 올바로 파악하고 재설정하여 그에 맞춰 정치의 룰을 다시 짜는 대신, 그들에게 익숙하지만 현재로서는 무의미한 갈등 위에서 기존의 지지층을 재결집하여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7.

'평민'은 '서민'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서민'은 '민중'처럼 그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막연한 선의 거대한 대변자이면서 수혜자인 반면, '평민'에게는 분명한 외부의 적이 있다. '귀족'이 바로 그것이다. 평민은 귀족과 맞서서, 단결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지켜내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서민'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그 어떤 실존적 선택도 강요하지 않는다. 연봉 1억을 받아도, 수십억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별별 희한한 이유를 대면서 자신이 서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반면 스스로를 '평민'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분명한 실존적 선택이다. '귀족 마케팅'이 넘실거리고 '없어보이는 것'이 죄악처럼 여겨지는 오늘날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분명 그렇다.

바로 그렇기에 '평민'은 정치적인 힘을 갖는 단어다. '나는 평민이다, 그렇다면 너도 평민인가?'라고 유의미하게 물어볼 수 있는 그런 개념인 것이다. 스스로 평민이 아니라는 사람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귀족이겠군, 나는 다른 평민들과 함께 당신 같은 귀족에 맞서겠다'고 말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금수저'와 '흙수저'가 나뉘는 세상에서, 너는 누구인지, 혹은 누구의 편인지 물어볼 수 있는, 현실과 맞물려 제대로 작동하는 대립적 언어의 쌍을 우리는 지금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저 '귀족'의 범위 안에 우리는 수많은 이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창업주 일가'의 이익을 위해 왜 국민들이 납부한 국민연금이 투입되어야 하는가? 그들 같은 귀족을 위해 우리 평민들이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건물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귀족들은 땀흘려 일하는 평민을 내쫓고 권리금을 빼앗으며 임대료를 올려 자영업자들을 고사시킨다. 평민 집안의 자녀들은 날로 복잡해져가는 대입의 문턱에서 좌절하지만, 귀족들은 이미 자신들의 자녀를 일찌감치 외국에 빼돌려놓은 상태다. 여차하면 평민들이 총알받이 하는 사이 귀족의 아들들은 검은 머리 외국인이 되어 돌아와 통치할 기세다. 평민과 귀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21세기 대한민국을 가르는 갈등의 선이 너무도 또렷하게 보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한민국 노동 시장의 이중구조를 만들고 그것을 묵인하고 있는 '노동귀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 IMF 이후 대대적으로 비정규직이 늘어날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작은 기득권을 사수하는데 급급하여 정규직 노동조합 조직률도 늘리지 않고, 비정규직은 아예 내팽개쳤다.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그 노동귀족들은 경영귀족, 관료귀족들이 평민들의 노동권을 침탈하는 것을 반쯤은 방조와 묵인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도 진보는 '노동귀족'들이 내팽개친 평민들의 손을 잡는 대신,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이런 귀족'과 '저런 귀족' 사이의 선택지만을 국민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청년들은 공무원이나 대기업 사무직뿐 아니라 노동조합이 잘 조직된 대규모 블루칼라 사업장에 들어가는 것조차 하늘의 별 따기임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청년들에게, 더 나아가 정치적인 변화를 원하는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귀족들에 맞서 평민의 이익을 지켜줄 단단한 정치 조직이다.


8.

레드 컴플렉스는 통합진보당의 해산, 그리고 김정은의 뚱뚱한 몸매와 함께 정치의 장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대한민국은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 우리는 그 동력을 상실한 채 후진국으로 한 걸음씩 후퇴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야당은 철 지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만 끝없이 반복하면서 역사의 퇴행을 사실상 방조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정작 그 사이, 이제는 노력해도 안 되는 사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는 청년들은 '헬조선'을 외친다. 그것은 단순한 비관이나 풍자가 아니다. 신분제 사회의 복귀를 두려워하는 비명이다. 특권층, 양반, 귀족들이 지배했던 우울한 역사를 벗어나, 가까스로 노력한 만큼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태어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절망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 사회의 갈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은 귀족과 평민이 대립하는 나라다. 회사를 물려받고 건물을 물려받고 학벌과 명성을 물려받는 귀족들이 있고, 자기 손으로 아등바등 벌어도 가까스로 먹고 살까 말까 하는 평민들이 있다.

평민들이 귀족을 이기는 것은 역사의 당위다. 올바른 정치 세력이라면 평민의 편에 서야 한다. 이기고 싶은 정치 세력이라면 더더욱 평민의 편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평민들은 귀족보다 훨씬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갈아엎고, '노령화 핵폭탄'을 맞은 인구 구조를 이겨낼 수 있는 방안은 오직 그것 뿐이다. 갈등을 새로 짜라. 이제는 평민들이 힘을 합쳐 귀족과 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