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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4월 02일 13시 57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6월 02일 14시 12분 KST

잘라라, 일베하는 그 수습을

한겨레

1.

'이것은 또 다른 마녀사냥 아닌가?' 이른바 'KBS 일베 수습'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4월 1일부로 그가 정직원이 되어버린 후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일베라는 이유로 입사한 회사에서 잘리는 게 말이 되는가'라는 식의 논의가 드물게 관찰된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보자.

안주식 KBS PD협회장이 언급한 수습기자가 올린 글은 '생리휴가를 가고 싶은 여자는 직장 여자 상사에게 사용 당일 착용한 생리대를 제출하거나 사진 자료를 남겨서 감사위원회를 통과해야 한다', '핫팬츠나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닌 여자들은 공연음란죄로 처벌해야 된다', '밖에서 몸을 까고 다니는 뭐 여자들은 호텔가서 한 번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라는 내용이다. (관련 보도)

이러한 가치관에 KBS라는 조직이 동조하거나,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다. 앞서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안주식 KBS PD협회장은 "이 친구가 올렸다는 반성문은 사내 공개 게시판에 올라온 적이 없다. 반성문도 자신의 과거에 썼던 표현에 대해서 '조금 과했다'는 아주 가벼운 반성문이다. 구체적인 반성문은 아니었다고 건너서 들었다. 일종의 제스처였을 뿐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반성문을 썼느냐?'고 물어보면 '쓰지 않았다'고 하는 게 우리들 입장이다"고 밝혔다.

자, 이러한 '일베 기자' 논란이, KBS의 입사시험에 있어서 '사상검증'을 강화시킬 것이며, 결국 방향만 다를 뿐 또 하나의 '마녀사냥'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과연 그 우려는 타당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베에 혐오발언을 해놓고, 그걸 또 걸린 사람이 입사전형을 통과했다면, 그 혐오발언이 해당 채용 기관의 가치에 부합하는 것이 아닌 한, 어떤 식으로건 신입 선발 시스템에 오류가 있다는 뜻이다. 그걸 정정하는 것이 '사상검증'이 안 되도록 해야 하겠으나, KBS가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방식에 어떤 맹점이 있었고, 그 맹점을 타고 인격의 결함이 밝혀진 구성원이 입사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드러난 시점에 이미 '이 건으로 인해 KBS 입사시험에 사상검증이 포함될까 우려된다'는 말을 하는 건, 너무 편한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물론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이제는 그런 말을 할 시점이 아니다.

지금은 좀 더 보편적이고, 반박 불가능한 가치에 기반하여 논의를 펼쳐나가야 한다. 남들이 다 한 이야기다. '일베를 했다'로 대중의 이목이 쏠렸으면, '생리대 인증' 같은 구체적 여혐 발언의 위험성을 지목하는 식으로 말이다.


2.

문제는 일부 '진보'적인 사람들이, 오히려 '일베'라는 추상적인 기호에는 반대하면서, 구체적인 여성 혐오나 호남 차별 등에 대해, 실은 그리 큰 문제 의식을 절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베'라는 가짜 범주를 넘어서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형식이 내용이다.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내용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베에 글을 쓰면 일베 형식을 따라야 하고, 일베 형식은 여성혐오와 호남혐오를 근간으로 삼는다. 그 사이트에서 통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여성혐오 발언을 한다는 말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낙인찍기 = 집단주의 = 히틀러 = 스탈린 = 나빠요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일베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찍는 낙인'이 현존함을 인정하며, 동시에 '일베라는 낙인'이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고 있으며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베 하는 놈'이라는 낙인이 찍힌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이거 나 알아 나쁜 거야 일베 하는 애들 봤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사전적 정의상 '낙인찍기'에 속하긴 할 것이다. 그런데 '낙인찍기'라고 해서 그냥 '악'이라고만 하지 말고, 질문을 좀 나눠보자.

(1) 그 낙인이 과연 부당한 낙인인가?

(2) '일베 하는 애'가 가치관을 갱신하는데 그 낙인이 도움이 되지 않나?

(3) 제3자들에게도 유익한가?

첫째, 일베에서 활발한 사용자 노릇을 한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 그 사이트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화법인 여성혐오와 호남혐오를 자연스럽게 구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베 하는 놈'이라는 낙인이 '나쁜' 낙인이라면, 그것은 그 사이트의 언어 자체에 문제가 있고, 사용자가 그 속에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노력하여 벗어던질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일베는 나쁘다'는 낙인은, 당연히 '일베'를 하면서 본인도 모르게 혐오발언과 차별적 사고방식에 물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자기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여성혐오와 호남혐오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사실 한국 사회는 '비공식적'인 곳에서 늘 그래왔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공개적으로 문제시되고 있으며, 그 모든 문제의식을 포괄하는 단어가 바로 '일베'가 되었다. 여기서 '너는 일베'라는 말이, 그저 '딱지 붙이기'라는 이유로, 금기시되어야 할 필요가 있나?

오히려 '나는 일베를 했다, 나쁘다'라는 죄책감을 느낄 때, 비로소 스스로의 행동을 다잡고 보다 여성과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바람직한 시민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일베'에 무슨 미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너무도 명백하다. 여성차별과 호남차별이다. 그것을 공개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점점 도외시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됐지 해가 되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악'을 지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 무엇도 '악'이 아니라면, '선'을 지킬 수도 없다. 일베에는 이론의 여지 없이 '악'으로 취급될만한 여성혐오와 호남혐오가 득시글거리는데, 대체 무슨 '선'이 있는가?

여성혐오와 호남혐오. 그 거대한 악을 포괄하는 이름을 '일베'라고 하는 것, 그래서 '타자화'의 효과를 불러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도덕적 기준선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비난받을 소리를 하며 즐기고,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뭉친 자들을, 왜 '악'이라고 비난해서는 안 되는가?


3.

당연히 '일베가 안 되면, 오유도 잘라야 하는 거 아냐?' 같은 소리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리가 나올까봐 근심하는 행위가 가능한 시점은 진작에 지났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든 것이 잘 되었다면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답을 말하자면, 일베가 아니라 오유를 하더라도,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일삼고 있다면 당연히 문제시될 수 있다. 특히 민간 기업도 아니라 국민 전체의 세계 인식과 언어 생활 등을 책임지는 공영방송 KBS의 기자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사안에서 굳이 '일베'라는 이름을 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그 과장된 결벽성, 그것은 양비론으로 향하는 미끄러운 비탈길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묻자. '낙인찍기'는 나쁜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사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일단 낙인을 찍어야만 한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과정'을 겪기 위해서는, 자기 객관화가 요구되는데, 그러한 자기 객관화는 스스로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범주를 찾아내어 붙이고, 그 라벨을 갱신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낙인찍기가 자기 객관화로 향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자기 객관화를 한다면 스스로에게 찍혀있는 낙인을 응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 남자다. 그런데 내가 '한국 남자'라는 범주에 속한다고 흔히 여겨지는 이러저러한 악덕을 피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런 범주가 있음을 인정하고, 나 자신에 거기에 속하며, 아무리 발버둥쳐도 근본적으로는 탈피할 수 없음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나는 한국 남자 아니거든?' 이라고 우겨봐야,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나 자신의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된다.

하물며 '일베 회원'이라는 것은 벗어던질 수 있는 정체성이다. '나 아이디 지웠어요' 뭐 이런 인증하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일베 회원'이라는 범주가 갖는 불명예스러운 요소들을 인식하고, 극복하려 노력한다면, 나중에는 훨씬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너 일베 하냐?' 같은 말을 손쉽게 '폭력'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그 점에서, 오히려 본인들이 지향하는 '일베 회원의 정신적 교화'를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기독교적인 참회와 속죄가 가능할 게 아닌가.


4.

지금 한국 사회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적 평가와 반성이 끝난 것 같고, '여성가족부'도 있으니 페미니즘은 완성된 것 같고, 그래서 다들 알아서 먹고 사는 일에만 신경쓰면 될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도덕적으로, 또 법적으로 제재되어야 할 수많은 사안들이 존재하며, 그 각각은 너와 나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죄책감을 통해 유지된다.

'일베'를 무조건 타자화하지 말라는 속 편한 소리들을 보면, 과연 그들은 한국 사회의 진보를 원하는 것인지, 혹은 더 이상의 퇴보를 막아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지금 우리가 '일베의 타자화'를 걱정할 때인가? 그들로 인해 타자화되고 있는 수많은 소수자들은 걱정되지 않는가?

'일베에서 '생리대 인증' 같은 소리 하다 걸려도 괜찮다'는 메시지가 한국 사회에 유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공공연하게 여성 혐오 발언을 유포하던 일베 회원이 공영방송 KBS의 기자직을 수행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잘라라, 일베하는 그 수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