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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19일 10시 26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5월 19일 14시 12분 KST

이택광이야말로 어정쩡한 좌파다

지제크는 이 책 서문에 "나는 철저한 무신론자"라고 밝혔다. 모두 알다시피, 무신론자가 곧 좌파는 아니지만, 급진 좌파의 '급진'을 뿌리까지(radical) 사유하게 되면, 거기에 가닿게 된다. 이런 사실이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 대해 말해 주는 진실은, 이택광처럼 어정쩡한 좌파와 달리 급진 좌파는 같은 사건을 계급갈등에 고착시키거나 제국주의로 환원시키지 않고, 더 멀리 나아간다는 것이다. '가짜 좌파/급진 좌파'가 이런 기준으로 나뉘는 것이라면, 이처럼 어리석은 사도(使徒)는 어느 방으로 모셔야 할까?

ASSOCIATED PRESS

내가 슬라보예 지제크의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 쓴 <한겨레>의 서평을 읽고 이택광이 <한겨레> 지상과 인터넷 판에 반론을 올렸다. 그는 길이에서 차이가 날 뿐인 두 편의 글에서, 내가 지제크를 오독하고 지제크의 주장을 물구나무 세웠다고 말한다.

이택광은 대꾸할 가치도 없는 얘기를 포함해 꽤나 많은 것을 늘어놓았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것 세 가지만 짚는다. 그 전에 이택광은 물론이고, 이 글을 보고 있을 독자에게 한 가지 '돌발 퀴즈'를 내고 싶다. 서구 중심주의에 찌들대로 찌들어 보이는 아래의 글은 대체 누구의 것일까?

"현대 유럽의 가장 소중한 유산인 무신론은 어디로 간 것일까? 공직에 오르는 데 있어 무신론이 장애물이 아니라 완전히 적법한 자격조건일 수 있는 최초이자 유일한 문명은 유럽 문명이고, 현대 유럽의 독특함도 바로 이 점에 있는데 말이다. 무신론이야말로 가장 유럽다운 유산이며, 싸워서 지킬 가치가 있는 유산이다."

저 글은 지제크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 197쪽에 나오는 지제크의 말이다. 이택광은 저 말을 외면하고 싶겠지만, 저것이 지제크이며 나는 저런 신앙(?)을 가진 지제크를 지지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첫째. 이택광은 내가 '확증편향'을 기하고자 지제크의 말을 왜곡하고 누락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내가 지제크의 "우리는 샤를리 에브도에서 벌어진 살인을 분명히 정죄해야 한다. 은밀하게 경고하듯이 정죄해서도 안된다."라는 말 다음에 나오는 괄호를 누락시켰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누락시켰고, 그게 무슨 문제까지나 되는지 해당 대목 전체를 읽어 보자.

"우리는 샤를리 에브도에서 벌어진 살인을 분명히 정죄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유지시키는 근간을 공격하는 행위였다. 은밀하게 경고하듯이 정죄해서도 안 된다. (물론 샤를리 에브도는 은밀하게 비꼰다고 했지만 지나치게 화를 돋우었고 이슬람을 무시했다.)"(13쪽)

내가 괄호 안의 말을 누락시킨 것을 보고 이택광은 "장정일은 이 괄호 안 문장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그 다음 문장들부터 인용하고 있다"라면서 호들갑을 떤다. 농담을 약간 해보자면, 이런 호들갑은 이번 사건에 대한 지제크의 입장을 외면하고 싶은 부인(否認) 증상, 혹은 대타자에게 버려진 것과 같은 이 교수의 유기(遺棄) 불안마저 느끼게 해주지 않는가?

그래서 물어본다. 괄호 안의 말이 괄호 앞에 나오는 지제크의 입장을 취소하고 있는가? 괄호 밖의 말과 괄호 안의 말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이번 사건에 대한 지제크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가? 오히려 치명적이기는 신문이라는 한정된 지면에 쓰느라고 인용문 가운데 나오는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유지시키는 근간을 공격하는 행위였다"라는 말이 누락 되었던 것이 더 치명적이다. 지면의 제약 때문에 누락시킬 수밖에 없었던 저 말은 앞서 인용한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한 대목과 정확히 상응한다.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 화가들은 무신론자들이라는 점에서 지제크가 말하는 '가장 소중한 유럽의 유산'이었으며, 쿠아시 형제는 말 그대로 '유럽의 근간'을 공격한 것이다.

이택광은 내가 괄호 안의 문장을 누락시켰다고 한 차례 꾸짖은 다음, 괄호 안의 번역이 지제크의 뜻을 잘 전달하지 못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리 에브도의 스타일은 무슬림들을 너무 화나게 했고 수치스럽게 만들었다)"라는 수정문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교수가 수고를 아끼지 않은 저 수정문은, 안 그래도 내가 꺼내고 싶었던 화제로 우리를 인도한다. 저 괄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죄하라, 정죄하라, 그러나 샤를리 에브도와 같은 스타일로는 하지 말라!'

저 괄호문은 이슬람 비판을 하지 말라는 권고가 결코 아니다. 괄호문은 "스타일"을 문제 삼고 있을 뿐, 그것에만 유의한다면 이슬람 혹은 종교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제크의 일관된 신념을 뒷받침 해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글 끝에 나오는 마지막 인용이, 더 이상 의문이 들지 않게 만들어 줄 것이다.

둘째. 지제크는 이 책에서 이슬람을 비판하면 "이슬람 공포증이 있다는 말을 들을까봐 강박증자처럼 두려워하는" 좌파를 가리켜 "가짜 좌파"(15쪽)라고 야유하는데, 이택광은 그의 글에서 '가짜 좌파'를 아래와 같이 적시한다.

"유럽에서 좌파진영으로 분류되는 세력은 사민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한국처럼 '자유주의 좌파'가 좌파진영을 대거 점거하고 있는 형세와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조건에서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제크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의 책임을 물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제크가 이 책에서 맥락상 '자유주의 좌파'라고 부르는 세력은 프랑스 대통령 올랑드와 독일 총리 메르켈로 대표되는 사민주의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이택광의 감별인즉, 지제크가 말하는 '가짜 좌파'는 "프랑스 대통령 올랑드와 독일 총리 메르켈로 대표되는 사민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이택광의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감별이다. 저런 대중 상식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면 이택광은 지제크가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에서 소환하고자 하는 '급진 좌파'가 정녕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택광은 지제크가 비난하고 있는 '가짜 좌파'가 사민주의자들이라고 믿으면서,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에 대해 '진짜 좌파'의 모습을 보여 준 사람으로 사건 직후 이택광이 직접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서 같은 사건에 대해 대담을 하기도 했던 알랭 바디우를 꼽을 것이다.

올랑드나 메르켈과 같은 사민주의자들과 바디우의 공산주의는 분명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지만, 그들을 굳건하게 연결해 주는 공통점은 한사코 '이슬람 비판'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는 '관용'을 내세우기 때문이고, 후자는 계급갈등이라는 문제의식에 고착되었기 때문이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제크가 보기에 이슬람 비판을 회피하고 생략한다는 점에서 '사민주의자들=바디우'다. 이번 사건에서 계급갈등을 주요 모순으로 제시하는 바디우는 '진짜 좌파'처럼 보이지만, 지제크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진짜 좌파'나 '급진 좌파'가 되기에 충분치 않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진도를 나가게 된다.

셋째. 지제크는 아주 단호하게 "자유와 평등이라는 유산을 유지하려면 급진 좌파는 형제처럼 자유주의를 도와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근본주의를 물리치고, 근본주의의 뿌리를 잘라낼 수 있다"(21쪽)고 썼다. 하지만 이택광의 결론을 보면 그는 지제크가 말하는 '급진 좌파'에 대해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지제크가 이 책을 쓴 결정적인 이유도 파악하지 못한다. 급진 좌파의 정체와 위용에 대해서는 <한겨레> 지면에 명명백백히 써놓았으니 이택광 교수는 그것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지제크는 이 책 서문에 "나는 철저한 무신론자"(7쪽)라고 밝혔다. 모두 알다시피, 무신론자가 곧 좌파는 아니지만, 급진 좌파의 '급진'을 뿌리까지(radical) 사유하게 되면, 거기에 가닿게 된다. 이런 사실이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 대해 말해 주는 진실은, 이택광처럼 어정쩡한 좌파와 달리 급진 좌파는 같은 사건을 계급갈등에 고착시키거나 제국주의로 환원시키지 않고, 더 멀리 나아간다는 것이다. '가짜 좌파/급진 좌파'가 이런 기준으로 나뉘는 것이라면, 이처럼 어리석은 사도(使徒)는 어느 방으로 모셔야 할까?

마지막으로 "이슬람 혹은 종교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제크의 일관된 신념"을 제시해 보겠다는 앞서의 장담을 지키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진정한 무신론자라면 신성모독적인 발언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을 자극하여 자신의 입장을 강화할 필요가 전혀 없다. 또한 진정한 무신론자라면 (2006년 덴마크에서 일어난) 무함마드 만평 사건을 단순하게 타인의 믿음에 대한 존중의 문제로 환원하는 태도 역시 거부한다. 타인의 믿음에 대한 존중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는 것은 결국 두 가지 의미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타자를 어린애 대하듯 다루며 그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상처주지 않는 편을 택하는 태도이거나, '진리 체계들'이 복수로 존재한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 진리를 명백하게 주장하는 행위는 모두 폭력적인 강요라고 깎아내리는 태도이거나, 이렇게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이슬람을 존중어린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엄격한 태도로 비판적 분석을 해보면 어떨까? 이것이, 그리고 이것만이, 무슬림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을 자기 믿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진지한 성인들로 대접해야 하는 것이다."(<폭력이란 무엇인가>,197~198쪽)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