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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16일 09시 18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5월 16일 14시 12분 KST

LGBT 인권 운동의 뒷걸음질과 회복

인권 문제에 대한 인식은 단계적으로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역치를 넘어 스위치를 전환하듯 업그레이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를 이해하면 전체를 이해하는 눈이 변화한다. 예를 들어 흑인의 인권을 인정하면 투표권과 인종 간 결혼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70년대에만 해도 이런 사람들이 미국 문화 안에서 제법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LBGT 그룹은 그에 발맞춰 발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AIDS라는 거대한 질병과 함께 찾아온 80년대는 그들에게 재앙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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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혼의 실질적 승리와 게이-되기의 어려움 <2> LGBT 인권 운동의 뒷걸음질과 회복

1981년 미국에서는 면역력을 앗아가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질환이 발견되었다. 병을 유발하는 균이나 바이러스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영향을 받는 집단은 남성 동성애자라고 정해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동성애자 암gay cancer' 혹은 'GRID (gay-related immune deficiency)'라는 이름이 임시로 사용되었다. 이미 70년대의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팽팽하게 시위를 당기고 있던 미국 보수층은 원리주의 기독교의 정신 아래 레이건 정부를 출범시켰고, 사회 각층에서 기지개를 켜던 동성애 운동 세력들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대중문화 안에서 화려하게 꽃피었던, 게이들의 이름표가 붙은 '취향' 역시 눈 깜빡할 사이에 지워졌고, 게이들 자신 역시 눈앞에 도래한 멸종의 조짐에 몸을 떨며 자기 혐오와 부정의 세계로 밀려들어갔다. 이 무렵 이성애자들은 게이들로부터 빼앗은 원색과 화려한 패션을 자기들 것인 양 휘두르며 (당시에는 아직 게이가 아니었던) 조지 마이클과 보이 조지의 노래에 엉덩이를 흔들었다. 70년대에만 해도 금방 이루어질 것만 같았던 평등의 꿈은 80년대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점은, 변화의 속도와 방향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70년대의 급진적인 LBGT 운동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록 진행되었고 70년대 중에도 이미 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받고자 하는 법적 시도는 몇 번이나 있었다. 70년대에 제작된 문화 상품, 예를 들어 영화나 시트콤, 소설 같은 것들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미 이 무렵의 알만한 사람들, 다시 말해 배울 만큼 배운 '리버럴(한 이성애자)'들이 게이를 보는 관점은 지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인권 문제에 대한 인식은 단계적으로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역치를 넘어 스위치를 전환하듯 업그레이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를 이해하면 전체를 이해하는 눈이 변화한다. 예를 들어 흑인의 인권을 인정하면 투표권과 인종 간 결혼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70년대에만 해도 이런 사람들이 미국 문화 안에서 제법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LBGT 그룹은 그에 발맞춰 발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AIDS라는 거대한 질병과 함께 찾아온 80년대는 그들에게 재앙의 시절이었다. 살아남은 게이라도 주위에 죽은 친구가 수십 명은 있기 마련이었고 언제나 이 병마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게이들이 다시 힘을 찾기 시작한 것은 AIDS의 치료와 관리가 가능하게 된 90년대 중반 이후였다. 급진적인 운동가였던 미켈란젤로 시뇨릴레Michelangelo Signorile는 93년 저서 퀴어 인 아메리카Queer in America에서 퀴어라는 단어의 재정립을 선언했으며 (본래queer라는 단어는 '(잘못된 방식으로) 괴상한'이라는 의미이며 게이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시뇨릴레는 이를 게이들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단어로 새롭게 차용하였다), 커밍아웃의 중요성과 더불어 옷장 안에서 입 다문 동성애자들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 비슷한 시기에 이성애자들을 대상으로 한 섹스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한 댄 새비지Dan Savage는 칼럼을 시작하면서 상담자들이 자기에게 보내는 상담 편지를 반드시 "안녕 패곳! Hey, Faggot! (영어권에서 동성애자를 경멸하기 위해 사용하는 최하급의 단어. 팩fag이라고 줄여서 사용하기도 한다)"이라는 인사로 시작하게 했으며, 또 자신은 이성애자들을 번식꾼들breeders이라고 불렀다. 이런 정치적인 제스처들은 분명히 이성애자들과 다른 동성애자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비하적인 단어로 정의함으로써 내부자끼리의 유대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외부자들에게 자신감을 과시하는 의도로 기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어디까지나 쇼-오프show-off를 위한 장치였고, 새비지는 칼럼 시작 6년 후에 패곳과 번식꾼이라는 단어 사용을 중단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게이들의 공격성이 어느 정도 누그러들면서 게이들과 대중문화의 관계 역시 회복되었고, 동거 관계와 이보다 더 많은 법적 보호를 포함한 시민결합civil union이라는 형태의 동성애자 파트너쉽 법적 보호 장치는 당연한 것으로 미국민 대부분에게 받아들여지기에 이르렀다. 미국 대중은 아직 동성혼을 받아들일 전면적인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지만, 적어도 TV에 등장하는 엘렌 모건이나 윌 트루먼 같은 인물들이 좋은 파트너를 만나 안정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들의 행복을 빌어줄 정도의 관용적 태도는 사회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끝난 것이다. (계속)

*이 글은 지난해 독립잡지 'DOMINO' 4호에 실렸던 글을 편집하고 업데이트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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