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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02일 14시 33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5월 02일 14시 12분 KST

미국 동성애자 인권 운동의 발흥과 그 첫 번째 전성기

44회를 맞는 시카고의 게이 퍼레이드는 역사상 최다 인원 참가의 기록을 세웠다. 퍼레이드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은 대다수가 이성애자였고 가족단위로 나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 화기애애하고 건전한 장면은 나에게 놀라움과 위화감을 동시에 느끼게 만들었다. 도대체 게이 프라이드 행사가 언제부터 이렇게 건전한 것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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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혼의 실질적 승리와 게이-되기의 어려움 <1> 미국 동성애자 인권 운동의 발흥과 그 첫 번째 전성기

지난 해 여름 내가 살고 있는 시카고에서 행해진 게이 프라이드 행사는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DOMA(Defense of Marriage Act: 결혼보호법) 관련 대법원 판결이 나온지 며칠 지나지 않아 거행되었다. 상쾌한 햇살 아래서 2시간 동안 맞이한 퍼레이드는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놀랍기도 했다. 시장인 램 임마누엘Rahm Emanuel이 선두에 서서 퍼레이드 행렬을 열었고, 게이 동네인 보이스타운Boystown에 집결한 백만 명의 시민들은 환호하며 이를 즐겼다. 44회를 맞는 시카고의 게이 퍼레이드는 역사상 최다 인원 참가의 기록을 세웠다.

당연히 퍼레이드의 테마는 '동성혼'이었다. 며칠 전 DOMA 판결도 판결이지만, 더 큰 이유는 지난 5월 이곳 시카고에서 동성혼 합법화를 위한 모든 절차를 마쳐놓고도 결국 일정 안에 통과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퍼레이드에는 유독 정치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I will make you get married next year!"를 외치며 동성애자 인권 지지를(그리고 자기에게 투표해 줄 것을) 어필했다. 퍼레이드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은 대다수가 이성애자였고 가족단위로 나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어린 자녀를 무등 태워 엉덩이가 다 드러난 가죽 바지를 입은 콧수염 게이 아저씨를 구경시키고 웨딩드레스를 늘씬하게 차려입은 2미터짜리 드랙퀸들을 불러세워 사진을 찍었다. 누구도 내년이면 이 도시에서 동성혼이 합법화될 것이며 너와 내가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이 화기애애하고 건전한 장면은 나에게 놀라움과 위화감을 동시에 느끼게 만들었다. 도대체 게이 프라이드 행사가 언제부터 이렇게 건전한 것이 되었나?

간단하게 역사를 정리해보자. 흔히들 알고 있듯 1969년 스톤월 폭동에서 촉발된 현대 동성애인권운동은, 당대의 정신이던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의 한 축이 되어 순식간에 강력한 힘을 축적했다. 69년과 70년 사이에는 미국 대부분의 주요 도시에서 LGBT 퍼레이드가 시작되었고, 73년에는 미국 정신의학 협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APA가 질병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했다. 뒤를 이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동성애가 비범죄화되었으며, 하비 밀크Harvey Milk를 비롯해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밝히고도 미국 공직에 선출되는 자들이 등장했다.

50대 초등학교 교사였던 진 맨포드Jeanne Manford는, 인권운동가였던 아들이 정치집회에 참여했다 경찰들에게 두드려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게이 자녀를 지지하는 부모들의 연합Parents of Gays Unite in Support for Our Children"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거리로 나가 시위를 시작했다.. 이 모임은 '레즈비언과 게이들의 부모, 가족, 친구Parents, Families and Friends of Lesbians and Gays: PFLAG이라는 전국적인 모임으로 발전했다 (PFLAG은 피-플랙이라고 읽는다).

베트남 패전으로 인한 우울함은 기존 질서에 대한 불신과 개혁의 욕구로 전환되었으며, 게이들은 이 흐름을 타고 유연하게 자기들의 존재를 과시했다. 이 무렵 게이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확인하고 싶으신 분들은 70년말과 80년대 초의 다이애나 로스 콘서트 비디오들을 찾아보시길 권한다. 절정에 다다른 게이 캠프와 디바 숭배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뉴욕이나 다른 미국 대도시에서 70년대를 경험한 올드 스쿨 게이들에게 이 당시에 대해 물어보면 다들 신나서 자기들이 얼마나 열심히 잘 놀았는지를 설명해준다. 뉴욕의 크리스토퍼 거리와 샌프란시스코의 카스트로 거리는 언제나 게이들로 가득 차 있었고 다들 포르노 스타 같은 콧수염을 기르고 틈만 나면 모르는 상대와 섹스를 했다. 이야기만 들으면, 당시에 좀 잘 나갔던 게이 치고 누레예프Rudolf Nureyev랑 한 번 안 자봤다는 게이를 찾기 힘들 지경이다. 게이들의 자유분방한 관계 맺기는 페미니스트 이웃들에게 기존의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를 대신할 대안적인 결합에 대한 영감을 주었고 둘은 이따금 반목하기도 하면서, 하지만 대부분의 영역에서 목소리를 합쳐서 권리를 주장하고 길에 나와 함께 싸웠다. '게이'라는 단어는 성적인 모험과 정치적인 급진성을 당연히 내부에 포함한 것으로 여겨졌다.

1979년에 이르러서는 인권운동가 톰 브로햄Tom Brougham이 1:1의 동성애 관계를 법적으로 보호하고자 하는 시도로써 '동거 관계Domestic Partnership'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결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장기간 함께 살며 경제공동체로 기능하는 두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70년대를 관통한 거센 인권운동의 흐름을 생각하면 놀랍게도, 이 제도가 실제로 미국에 자리를 잡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캘리포니아주가 미국에서 최초로 동거 관계를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는 유사 결혼 관계로 법제화 한 것은 이로부터 20여년 후인 1999년의 일이었다

어째서? 70년대 초중반만 해도 금방 바뀔 것만 같았던 세상은 왜 20년이나 정지해버렸을까? 그렇다. 80년대는 AIDS와 함께 왔다. (계속)

*이 글은 지난해 독립잡지 'DOMINO' 4호에 실렸던 글을 편집하고 업데이트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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