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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03일 11시 52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2월 03일 14시 12분 KST

누구를 위한 선택인가

글 | 김수정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을 천직으로 자부하며 보냈던 공립학교 교사 생활 10여년. 결혼 전부터 교직을 계속하기로 남편과 철석같이 약속했지만,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부모님이 아이를 돌봐줄 상황도 아니었고, 베이비시터를 구했지만 역시 문제가 생겼다. 3개월 육아휴직을 내고 아이와 함께 보내면서, 아이가 엄마를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물론 육아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좀 더 잘 이뤄진다면 좋겠지만, 그와는 별도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자식을 낳은 부모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 정서적으로 안정된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결심이 쉽지 않았지만 결국 교직을 포기했다. 자연을 벗 삼아 동심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주려 했다. 하교 후엔 그 흔한 방과후교실은 물론 학원 하나 보내지 않았다. 책가방을 거실에 던져놓고 놀 권리, 쉼의 시간을 맘껏 허용하려고 했다.

아이들은 부모가 일깨워주는 세상만큼 성장한다는데, 원칙 있는 엄마로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다. 오랜 시간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자녀를 제대로 알아야 하며, 이 원칙이 정말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니 말이다. 공부보다 행복을 강조하다가 모두 다 놓치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들이 그토록 극성스럽게 챙기는 학교성적표가 작은 공부의 증명서라면, 독서와 창의력과 인성은 더 큰 공부라는 믿음이 내게는 있다. '배를 만들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다면 미치도록 바다를 그리워하게 하라'는 말처럼, 아이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쉼의 여유를 줘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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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정

초등교육에서도 위용을 떨지는 교육열과 사교육 경쟁

학부모 활동과 대학 강단 등에서 많은 부모들을 만나며 "초등학교 시작이 어떠냐에 따라 그 후가 달라진다"는 말을 듣곤 한다. 좀 더 좋은 교육을 위해 사립초등학교를 선택하는 분들도 있다. 우리나라의 초등학교를 설립유형에 따라 비교해보면 교육과정 운영, 학급당 학생수 같은 교육 여건, 교원의 연령 구성과 학력 수준, 학생들의 학업성취도 등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사립초등학교는 국공립초등학교에 비해 도시를 중심으로 설립되었고, 외국어, 예체능, 인성교육 등 특성화된 교과를 학교 여건에 따라 선택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사립의 장점이라면 앞서가는 교육프로그램과 다양한 예체능지도라 할 수 있다. "학비는 비싸지만 학습에서부터 예체능까지 학교에서 책임져주니 사교육비가 안 들어서 오히려 이익"이라고 말들을 한다.

그런데 현실은 또 조금 다르다. 전교생이 바이올린 레슨을 받는 한 사립학교의 사례가 있다. 자녀가 학교에서 바이올린 레슨을 받아 실력이 향상되었다면 사교육비 절약 효과가 있는 것이겠지만, 실제 대부분의 학부모는 그렇게 두지 않는다. 자녀가 학교의 바이올린 수업시간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도록 집에서 미리 바이올린을 가르쳐서 보낸다. 또한 수준 높은 영어수업을 학교에서 해주기 때문에 영어도 사교육으로 예습을 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자녀가 좌절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영어를 따로 더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몇몇 학부모들은 학습에 대한 준비를 많이 하지 않은 채 사립초등학교를 보냈는데 수업시간마다 아이가 많이 힘들어 했다는 얘길 내게 들려주었다. 처음 접하는 어려운 공부에 당황하고, 다른 친구들은 다 아는걸 자기만 몰라서 힘들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와 엄마가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사립초등학교 교사들은 우수한 인재를 길러낸다는 자부심은 크지만,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점은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고 말한다. 때로는 교육열이 과도한 학부모의 등쌀에 치이기도 하고, 불합리한 교육현실 탓에 자괴감에 빠져들기도 한다고 말이다.

누구를 위한 선택인가

고등학교의 줄 세우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구지역의 한 초등학교에선 급식 순서도 성적순에 따른다고 하니 할 말을 잃게 된다. 정작 학부모는 이 문제에 관한한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현실론' 뒤에 숨어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다는 핑계는 가히 천하무적이다. 그리하여 그런 현실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은 거의 고착화 단계로 진입하지 않았나 싶다. 제로섬게임에 가까운 경쟁교육은 해마다 상승되면서 더 높은 강도로 일상화 되었고, '교육 시장화 정책'에 힘입어 가속화되었다. 문제는 이런 참담한 현실보다 이 같은 현실에 대한 교육주체들의 무감각과 무반응에 있다.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그저 어른이 시키는 대로 공부해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 어른들은 이야기한다. "이게 다 너를 위해 그러는 거야." 어떤 때는 "오늘만 노는 거야, 갔다 오면 다시 공부해야해"라며 조건부 자유를 준다. 그렇게 오늘의 행복을, 오늘의 자유를 뒤로 미루면서 언제나 불행한 매일 매일을 반복한다. 모든 부모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부모가 적지 않기에, 한국 어린이의 행복지수는 OECD 꼴찌를 기록하고, 한국청소년의 자살률은 그토록 높은 것이 아닐까. 아프니까 청춘이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야하는 게 청춘이라면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고 넘어지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우리 어른들이다.

이제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자. 지금의 선택이 아이를 위한 것인지, 부모를 위한 것인지. 아이가 가슴에 품은 꿈 한 조각을 이야기 그릇에 담아낼 시간을 주자. 어른들에 의해 퇴색된 회색 세상이 아니라, '아이가 꿈꾸는 세상'을 마음껏 천연색으로 그리도록 말이다.

* 이 글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