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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3일 05시 14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13일 14시 12분 KST

수능 때문에 비행기도 못 뜨는 나라, 비정상 아닌가

연합뉴스

글 | 심나리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선임연구원

수험생들은 후배들의 응원을 받으며 바삐 교문 안으로 사라지고, 늦어서 경찰 오토바이를 타고 가까스로 당도하는 학생들도 한둘씩 보인다. 교문 앞에서 눈물을 훔치는 엄마들은 어김없이 있고, 교문이 닫힌 뒤에도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교문에 엿을 붙이고 기도를 하는 부모들도 눈에 띈다. 수능 한파가 없는 걸 제외하면 필자가 수능을 봤던 1999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이다. 1999년 11월 학교 앞 풍경과 다르지 않은 2015년 11월 12일을 보내며 생각해본다. 내 아들이 고3이 되는 2027년에도 똑같은 모습일까?

필자가 언론사 기자였던 2006년 11월 수능날 아침, 배화여고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다음과 같은 간단한 기록을 남겼었다.

아직도 수능 보는 아이들을 옆에서만 봐도 눈물이 난다. 아이들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아이들과 1년 내내, 혹은 고등학교 생활 내내 수험생활을 함께 하는 부모님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예전처럼 교문에 덕지덕지 엿이 붙어 있던 진풍경이나 교문을 붙들고 통곡하는 엄마들의 모습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인터뷰를 했던 한 어머니는 자식이 '반수'를 했는데 '본래 혼자 잘 하는 애라서 신경을 덜 썼는데 많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어느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1999년 수능날의 기억은 이미 저 편으로 물러났지만, 9년 전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던 어머니의 마음이 새삼 나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이 과정을 똑같이 겪을지 모를 내 아들에게까지 생각이 미친 까닭일 테다. 도대체 수능이 무어라고,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고생하고 부모들은 미안함에 눈물을 쏟아야 하는걸까. 수능을 앞두고 '대박기원'을 내건 각종 상품과 이벤트가 온 나라에 넘쳐나고, 모든 언론이 수능날의 헤드라인 뉴스를 '수능장 표정'으로 도배하는 게 정상일까? 일부 직장은 수능날 출근 시간을 1시간씩 늦추기도 한다. 올해도 어김 없이 '듣기평가가 치러지는 오후에는 약 30여분간 대한민국의 모든 항공기가 이착륙을 할 수 없다'는 국토교통부의 발표를 보며,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수능의 기능을 한 마디로 설명한다면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 아닐까 싶다. 12년간 받은 교육의 모든 것을 단 하루 시험에 탈탈 털어넣고, 그 결과에 따라 줄을 서서 대학에 들어가는 게 보통이다. 요즘 같은 저성장 침체기에는 좋은 대학을 나와도 직장선택과 결혼에서 별다른 혜택을 보기 어렵다는 걸 매일 피부로 느끼고 있지만, 그래도 '좋은 대학 -> 더 많은 기회 -> 나은 직장 -> 결혼과 안정된 삶'이라는 공식은 여전히 우리 머리에 박혀 있다.

오늘 아침 들은 라디오에서 한 수험생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어려움을 처음 겪는 건데 잘 버텨내야죠. 성공하기 위해서는." 성공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보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 남들이 좋다고 하는 대학을 나와서 살아보니 자신이 진정 '성공'했다고 생각을 하는가? 수능(혹은 학력고사)이라는 관문을 제대로 넘지 못했더라면 우리의 삶은 성공이라는 잣대에서 더 멀어졌을까?

일 년에 단 한 번의 기회로 누군가의 미래를 재단하는 것은 오만하고 지나치게 편의주의적이다.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 혹은 옳지도 않다는 것은 이 과정을 거쳐온 누구나 한 번쯤 던져봤음직한 의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어떤 부모들은 자식들을 '스터디룸 가구'에 가두고 자정에 가깝도록 학원 뺑뺑이를 돌린다. '다 너를 위한 것'이라는 전능해보이는 레토릭은 멈추지 않는다. 정말 자식을 위한 것인지 냉정히 물어봐야 한다.

'공부가 전부가 아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란 말도 '다 너를 위한 것'이라는 말만큼 입에 붙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부모들과 아이들은 대학입시 전까지는 공부가 전부인 양, 성적순으로 행복의 크기가 달라지는 양 행동한다. 공부가 세상의 중심이요, 공부를 잘하면 얼마 정도의 일탈도 눈감아 주는 세상이 됐다. '역사교과서가 국정화되면 아이들이 다양한 교과서를 공부하느라 시험에 혼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며 국정화에 찬성한 부모들을 봤을 땐 '주객전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또, 출근 시간을 늦추고 항공기 이착륙을 불허하는 등 일상과 다른 조치를 취하는 것은 공부와 시험이란 것 자체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아이들의 특권 의식을 부추기기까지 한다. '고3이 벼슬'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어른들이 아이들 머리에 억지로 관을 씌워줬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지난해 1,450명의 20세 이하 청소년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통계청은 밝혔다. 성적비관과 우울증이 자살 원인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교에서 매년 한 두명이 성적을 비관해 극단적 선택을 했고, 상당수 학생들은 이로 인해 큰 충격에 빠졌었다. 자신과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어느날 이 세상을 등졌을 때, 아이들이 받은 상처는 치유가 되고 있기는 한걸까. 당사자가 내 자식이 아닐꺼라는 보장은 있는 것인가. '경쟁자가 한 명 없어져서 뒤로 웃었다'는 말은 그저 헛된 소문이었을 것이다. 올해에도 수능 성적 발표를 전후로 또 이런 뉴스들이 신문 한 켠에 실릴까 벌써부터 걱정된다.

부모도 힘들고, 아이들도 힘들다. 어른, 아이 모두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이 입시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지적은 많지만 정작 그 어느 정치인도 손대길 꺼려한다. 입시제도 변화로 당장 내가, 혹은 내 자식이 피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대중의 불안감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수험생 60여만 명과 이들의 부모 120여만 명, 교사 40여만 명, 합해서 200만이 넘는 인구가 입시제도의 직간접적 이해당사자이자 현재 혹은 미래의 유권자다.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에게 무거운 숙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결국은 교육의 당사자인 학생들과 학부모, 교사들이 스스로 입시제도 변혁을 외쳐야 한다. 그래야 그 뜻에 동의하는 정치인이 용기를 내서 앞에 나설 수 있다. 만일 정치인이 먼저 용기를 냈다면 더 큰 목소리로 이를 응원해주는 역할도 우리가 해야 한다.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갈 이 사회를 위해 입시제도, 더 나아가 교육제도 전반에 대한 수술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면서도 '일단 내 자식 시험본 후'를 말하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하지 않는가.

필자는 2027년 11월 어느 학교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자식이 공부를 최고의 선(善)이라 생각하며 살게 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부모로서의 삶이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이 환경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문제가 아니더라도, 2015년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충분히 힘들게 살고 있지 않은가.

* 이 글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