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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5월 18일 13시 51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5월 19일 14시 12분 KST

[인터뷰] 5.18 그린 연출 고선웅

"시대의 흐름이나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인간은 참 가볍게 깔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깔리고 짓밟힌다. 그리고 잊힌다. 6.25 때 전사자가 20만 명, 30만 명, 혹은 100만 명이라고 하는데, 엄청나게 큰 숫자다. 그런데 숫자만 기억한다. 개인은 없다. <푸르른 날에>는 이야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과 가치가 좋았다. 30년이 지났으니까 분노만 할 수는 없는 일 같았다. 30년 동안 울화를 가지고 산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 같아서 '그만 내려놨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했다."

5월이다. '연극 좀 본다'하는 이가 있다면 <푸르른 날에>를 떠올릴지도 모를 때다. 5.18 광주의 기억을 무대 위로 옮긴 이 작품은 5년째 장수하며 5월을 대표하는 연극으로 자리매김했다. <푸르른 날에>의 각색과 연출을 맡은 연출가 고선웅을 5월 초 서울 성신여대 앞 카페에서 만났다.

고선웅 플레이팩토리 마방진 대표이사 ⓒ서울문화재단 블로그

- 연극 <푸르른 날에>를 검색하니 '5월에 꼭 봐야 하는 연극' 이렇게 나온다. 소재가 무거워서 보기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코믹한 요소를 많이 넣었더라. 웃음이 무거움을 더 잘 이끌어 주는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의도한 것인가?

= 의도한 것이다. 사람들을 이완시키거나, 이완시킨 상태를 유지해야 동화가 가능하다. 스트레스 풀려고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이지, 고통스럽기 위해 가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비극도 카타르시스가 있기 때문에 관람을 하는 것인데, 너무 주눅 들게 정직하게만 보여주려고 하면 힘들어진다. 가령, 위안부를 정통으로 보여준다고 하면 그걸 어떻게 보겠나. 참담해서 못 본다. 그래서 연극만의 어떠한 해법을 통해서 관객들이 쉽고 편하게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문 장면이라든지, 김남주 시인의 시 <학살2>가 낭독될 때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힘들었다. 너무 진지해지면 힘들어진다면서도 이런 장면을 넣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 정공법으로 무엇을 보여줌으로써 아예 압도해 버리면 상관없다. 어중된 정도의 사유, 가령 연극에서 매질을 하는데 비명을 막 질러버리는 걸로는 재미가 없다. 그런데 (극 중 고문의 도구로 쓰인) 물이라고 하는 것은 거울처럼 비춰지는 메타포 같은 것이기도 해서 다르다.

< 학살2>는 그것이 갖고 있는 냉정한 분노가 있다. 뭐라고 할까... 객관적이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쉽고 간결하게 광주항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딱 정리해주는 느낌이다. 35년이나 됐는데 그 상황을 누가 알겠나. 모른다. 때문에 그것을 정통으로 보여주게 되면 관객들도 이해하기 좋고, 이 이야기가 진지한 의도를 가지고 준비된 작품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 5.18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6학년 즈음 광주항쟁에 대한 내용을 17인치 흑백텔레비전으로 봤다. 그때만 해도 육공트럭 한 대 있고, 광주에서 무슨 소요사태가 났다는 정도로만 들었다. 그런데 나중에 광주 자취방 주인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동명동 굴레방다리에 창고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핏물이 밑으로 나오고, 밤이 되면 총소리가 나서 이불을 다 뒤집어쓰고 살 수밖에 없었다. 죽은 사람도 많이 봤다." 무척 놀랐다.

누나가 84학번인데 데모를 많이 했다. 우리 방에서 스터디를 하기도 해서 자연스레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같은 책들도 봤다.

- <들소의 달>도 5.18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 고문을 한 달 받고 나와서 평생 그 기억에서 못 빠져나온 사람이 있었다. 18년 동안의 전과가 7범인가 되는데, 길 가던 사람을 벽돌로 막 찍고 그런다. 광주항쟁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이 불쌍해 보였다. 그 이야기로 <들소의 달>을 썼다.

시대의 흐름이나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인간은 참 가볍게 깔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깔리고 짓밟힌다. 그리고 잊힌다. 6.25 때 전사자가 20만 명, 30만 명, 혹은 100만 명이라고 하는데, 엄청나게 큰 숫자다. 그런데 숫자만 기억한다. 개인은 없다.

<푸르른 날에>는 이야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과 가치가 좋았다. 30년이 지났으니까 분노만 할 수는 없는 일 같았다. 30년 동안 울화를 가지고 산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 같아서 '그만 내려놨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했다.

- 무거운 주제인데, 이걸 갖고 관객들을 깊이 침잠시켜야겠다는 욕심이 나지 않나?

= 저는 침잠해서 들어가는 것은 연극문법이 아닌 것 같다. 책은 읽다가 덮으면 그만이지만, 극장은 들어오면 못 나간다. 잡아놓고 피해가지도 못하게 고통스러운 장면들을 연출해버리면 관객은 돌아버린다.

- 공연이 롱런 중인 건 광주에 대한 기억이나 배움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작품이 어필을 하기 때문 아닐까. 관객들과의 소통이라든지 연극의 사회적 역할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만드는지?

= 연극 자체가 '뭘 이야기 할 것이냐'지 않나. 내가 원하는 주제를 이야기 했다고 치자. 하지만 보는 사람이 관심 없어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연극의 시작은 누구에게 보여주겠다고 하는 순간 이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관객과 연극을 만드는 팀이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다. 이걸 보고 관객들이 나 같으면 다음에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가에 대해 고민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어렵고 사회참여적 주제는 이야기를 잘 풀면 관객과 호흡이 잘 맞아서 더 좋아질 수 있다. 매체마다 특성이 있을 텐데, 연극을 통해 봤을 때 더 좋은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지금은 워낙 볼거리가 발달하고 매체가 많아져서 연극이 위축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연극은 고귀해지는 것 같다.

- 고귀해진다?

= 관심을 덜 갖는 주제에 대해 연극은 이야기한다. 모든 게 빠른 이 시대에 연극은 느리다. 느린 연극을 보며 사람들은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 생각할 수 있다.

- 연극이라는 예술이 꼭 사회 참여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작품을 내놓는 이유는?

= 공교롭게도 그런 작품을 하게 된 것이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같은 경우는 다르다. 세상에는 할 이야기가 많다. 세상에 의미가 있다고 하면 하는 것이다.

- 세상에서의 의미가 중요하다?

= 의미 없이는 할 수가 없다. 주제가 없으면 좀 공허해진다. 가령 돈을 벌기 위해서 오락 연극을 했다고 치자. 이걸 오늘도, 내일도, 토요일엔 두 번. 얼마나 힘들겠나.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계속 물어볼 수밖에 없다. 보는 사람한테도 질문을 받는다. 때문에 의미 없이 하기는 어렵다.

- 예술을 위한 예술, 오로지 미(美)만 추구하는 분들도 있다.

= 그것도 의미가 있다. 미학적 성취만 얻기 위한 작업을 통해서도 우리는 마음이 투명해지거나, 기분이 좋아지거나, 영감을 얻는다.

- 상업적 오락 연극의 의미를 낮게 평가하나?

= 저는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러면 "너는 자식아,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니냐?"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렇지만 저는 아니다. 밥집을 하는데 맛있는 밥을 해줘서 돈 버는 것과, 돈을 벌기 위해서 밥을 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 '배고프다'고 하는 연극계에서 성공했다. 결과만 보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포장이라고 느끼지는 않을까. 아니면 트렌드를 잘 읽거나 상업성을 겸비한 예술가라고 보지 않을까.

= 저는 진지한 사람이다. 트렌드에 대해서는 (휴대전화를 들어 보이며) 2G 폰이다. 트렌드를 읽으려고 애쓰진 않는다. 다만 연극을 스무 살부터 했으니 28년 동안 한 셈인데, 옛날에 미덕으로 보였던 것이 나중에는 별 매력이 없는 경우도 많다. 어머니는 김장을 60년 이상 하셨는데도 양념이 매번 조금씩 바뀐다. 어떤 때는 녹각을 빼고 톳을 집어넣었다가, 또 어떤 때엔 굴을 집어넣었다가. 이런 것처럼 연극도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 진화한다. 진화를 하다보면 연극을 표현하는 방식도 달라지는 것이다.

- 벌써 28년이나 했나. 처음 연극에 발을 담그게 된 계기라면?

= 대학 들어가자마자 바로 연극반에 들어갔다. 처음엔 배우를 했는데 연출이 군대 가고 하다 보니 연출을 했다. 그런데 적성에 맞더라. 연출을 하다 보니 대본이 마음에 안 들 때 각색을 하게 됐다. 배우가 7명인데 작품 속 인물이 6명이면 배역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각색도 하고 글도 쓰게 됐다.

- 어느 기사에서 보니 고선웅 연출이 '마법의 필력'을 가졌다고 평가하더라 .

= (손사래를 치며) 아휴, 턱도 없는 소리다. 그런 게 어디 있겠나.

- 굉장히 좋은 평가들을 많이 받으셨다. 반전 가득한 유머, 연극적 놀이성이 극대화된 고선웅의 연출문법이란 정의도 있더라 .

= 좋게 봐주신 거라 생각한다. 연극을 업으로 삼고 있다 보니 집중해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걸 너무 좋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 대학로에 많은 연극이 올라오는데, '웰 메이드'라 할 수 있는 작품은 많지 않아 보인다 .

= 좋은 프로덕션이 좋은 연극을 만드는 것인데, 그만큼 열악하다는 증거다. 좋은 작품이 나오려면 자본이 몰리고 관객이 몰려서 그게 재투자가 돼서 작품의 질이 올라가야 한다. 영세한 상태에서 지원금을 받아 연극을 하다 보니 악순환이 된다 .

- 문화계 전반이 정부 지원에 많이 의존한다는 지적도 있다.

= 관객들이 많아져야 하는데, 사람들이 연극을 많이 잘 안보니까...

- 연극을 잘 안 보는 것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 그렇다.

- 더 나빠졌다고 보나?

=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늘긴 는 것 같다. 비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지원금 없이는 사실 불가능하더라. 처음에 저도 지원을 받고나서 자력갱생 해보려고 진짜 노력을 많이 했다. 지원금 보다 훨씬 돈을 많이 써서 작품을 만들었다. 그래서 제 돈 빵꾸도 나고 그랬다. 지속 불가능하더라. 그래서 나중에는 지원금에 맞는 규모의 경제를 찾게 되고, 오히려 더 창의적인 발견도 하게 됐다. 돈이 없으면 없을수록 아이디어를 내야 되는 측면이 있다 .

- 돈이 없으면 없을수록 돈 되는 걸 찾게 되지는 않나 ?

= 연극하는 사람들이 순수하다. 어리석다 싶을 정도로 순수하게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물론 대학로에 상업극 올리는 프로덕션들이 있긴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연극하는 사람들은 아티스트들이다. 존경할만한 사람들이다.

- 지원을 받기 위해 보고서 작성을 많이 해야 하는 등 창작적 사고를 방해하는 일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지원해줄까요'라고 물어보는데, 저는 그냥 원론적 이야기를 주로 한다. 작가를 키워야 한다고. 왜냐하면 작가가 시작이기 대문이다. 어떤 대본이 있고 '이 대본 좋네. 하자' 라고 연출이 의지를 갖게 되면, 프로덕션을 통해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그러면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이다. 그래서 희곡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작가들이 계속 떠나고 있다. 개런티가 너무 적다보니 영화나 TV드라마로 간다. 희곡이 안 나온다. 결국 로열티 주고 외국 작품을 사게 될 수밖에 없다.

- 번역만 해서 무대에 올리게 되는 것인가?

= 외국 작품들은 누가 봐도 좀 낯설다. 작품은 잘 짜여 있을지 몰라도 우리 이야기, 우리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을 '좋다, 좋다' 하는데, 저는 솔직히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다 .

연극 칼로막베스 ⓒ플레이팩토리 마방진

- <칼로막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나?

= 그렇다. 이야기의 주제의식이나 이런 건 좋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몇 백 번을 한다. 영어권도 아닌데.

우리식 작가를 키웠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도 마찬가지이지만 체홉, 입센같이 오래 갈 수 있는 희곡 작가 말이다. 대단한 작가 한 명이 연극계를 어떠한 반열에 올린다. 세상을 관통하는 시선과 관점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들이 많아지면 연극계는 번성하게 되는 것이다 .

- 좋은 작가들이 안 보이나?

= 배삼식, 장우재, 김낙형, 이해재 등 잘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들만 가지고는 안 된다. 처음 연극 시작할 때 '내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식당에서 반찬 하나가 더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좋은 작가들이 많아지고 양질의 작품이 많이 올라가면, 사람들은 연극을 많이 볼 것 아닌가.

연극을 봤는데 재미가 없으면 그 사람은 다시는 연극을 안 본다. 영화는 한 편이 재미없어도 다음에 다른 영화를 보지만, 연극은 그러면 다시 안 보게 된다 .

- 연극은 사실 앉아있는 게 좀 힘들다.

= 그러니까. 그래서 잘못 올린 작품 하나가 연극계를 추락시킨다고 말한다. 연극은 뭐라고 해야 할까... 같이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다. 좋은 작품이 올라가면 연극계가 좋아지는 것이고, 나쁜 작품이 올라가면 같이 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잘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사람 키우는 일도 절대 간과하면 안 된다 .

- 지금은 사람 키우는 일은 전혀 못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푸르른 날에>는 5년간 같은 배우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어떤 힘 때문일까?

= 작품, 그리고 자신들의 역할, 프로덕션의 처우, 모든 것들이 잘 맞았나보다. 그래서 이탈자들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이렇게 됐지만, 그러기가 정말 쉽지는 않다.

배우들 스케줄이 바빠서 해마다 시즌을 빼기가 쉽지 않다. 이거 하면서 배우들이 영화도 많이 포기했다. 포기해야 될 것들이 자꾸 나오는데, 이 친구들이 이 작품 개런티 갖고 먹고 살기는 너무 힘들다. 그래서 그걸 강요할 수 없다. 초연 때 배우들은 올해가 마지막이다. 다들 아쉬워하지만 그렇게 됐다 .

연극 <푸르른 날에> ⓒ신시컴퍼니

- <푸르른 날에>는 기획사도 5년을 함께 했다고 들었다. 연극계가 워낙 영세해서 연출 한 사람이 캐스팅부터 홍보까지 다 챙긴다고 하던데, 최근에는 기획사가 함께 하는 일이 보편화된 것인가?

= 지금은 많이 그런 식으로 간다. 아니면 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다. 식당이 커지면 주방장이 상 차렸다, 설거지하다, 카운터 보다, 주차까지 할 수가 없다. 분업화가 필요하다. 안 되면 이곳저곳에서 펑크가 난다 .

- 이것도 규모가 좀 커진 쪽 이야기 아닌가. 영세한 극단이 여전히 많다.

= 그래서 홍보만 맡기고 나머지는 자기들 안에서 휘뚜루마뚜루 하기도 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생기는 에너지가 있긴 하지만, 양질의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은 힘들다 .

- 언젠가부터 문화를 산업이라고 이야기한다. 연극은 어떤가.

= 연극을 산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궤도에 올라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산업화가 되려면 인풋(input)과 아웃풋(output)이 정확해서 채산성이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러나 지금은 다 지원금에 의존해 작품이 창작되고 있으니 산업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자생력이 있어야 한다 .

- 다시 지원 이야기로 돌아왔다.

= 지원과 관련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 작품을 될 때까지 밀어주면 좋겠다. 한 작품을 지원해서 뿌리를 내리고 그것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면, 모범사례를 보고 다음 사람도 좇아오게 된다. '연극 저렇게 하면 될 수 있다,' '극본 괜찮고 연기 훌륭하면 롱런(long-run)할 수 있다'는 가능성들을 보여줘야 한다. 한 번에 2천만 원 이런 식으로 지원해서는 턱도 없다.

또 연극 자체를 홍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연극이라는 게 볼만한 것이라는 걸 알릴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지원을 한다면, 버스나 지하철에 일정한 지면을 갖춰서 연극인들이 계속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연극을 보면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식의 캠페인이나 문화달력에 연극을 실어주는 일 같은 것을 해주면 어떨까 싶다 .

- 연극 한 편 만드는 데 평균 얼마 정도 드나.

= 배우 개런티와 제작비, 극장 대관하면 1억 이상 든다. 대관이 하루에 1백만 원이라고 하면 한달 딱 공연하면 끝이다. 공연을 하면 한 달이나 두 달은 해야 손익분기점을 넘는데, 두 달을 빌려 버리면 답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2~3천만 원씩 지원해주니까 결국 배우들 개런티를 깎게 된다 .

- 모든 비용 다 떼고 남는 걸 연출가들이 받는 것인가?

= 연출가는 끝이 나야 받는다. 저는 형편이 좋은 쪽에 속한다. 함께 했던 기획사들이 나름 짱짱한 곳이었다 .

-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을 뮤지컬로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연극뿐 아니라 창극, 뮤지컬까지 하시는 건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까.

= 창극은 창으로 하는 것이고, 뮤지컬은 노래로 하는 것이니까 문법에 대한 이해가 조금만 있으면 된다. 다른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출 입봉을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했다. 이때 배우 조승우와 함께 했다. 이후에 <카르멘>도 하고, <지킬 앤 하이드>는 노랫말과 극본을 썼다. <원스>, <남한산성>도 .

- 연극계에서 키워진 사람들이 영화계로 간다. 좋은 배우를 빼앗긴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나?

= 영화 쪽으로 가는 건 좋은데 '가끔씩 돌아오면 좋겠다'란 생각을 한다. 연극으로 10년, 20년을 산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영화해서 형편이 나아지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다만 그 다음에 가끔씩이라도 연극계로 돌아오면 관객 저변이 확대 되지 않겠나. 그런데 영화 쪽 간 사람들이 다시는 힘든 연극으로 안 돌아오려 한다.

- 배우들은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많은데 반해 연출이란 직업은 다르다. 무대 예술이라는 스펙트럼 안에서 창극, 뮤지컬도 하고 있지만 배우만큼의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은 하고 있나 ?

= 사실 저는 지금 하는 게 재미있다. 재미있어서 별로 지치지도 않았다. 늘 새로운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멋진 영화를 보면 흥분이 되는데, 기회가 주어지면 나도 영화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 그래도 지금은 하는 작품마다 다 잘 되고 있다.

= (연극에 대한) 사랑 때문인 것 같다. 사랑하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지 않나? 작품을 하면서 '이걸 하면 돈을 얻겠다, 명예를 얻겠다'란 생각을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오로지 하나 '실수하면 안 되겠다'란 생각은 한다. 욕심을 부리면 망가진다. 작품의 본질이 상하고 천한 작품이 나온다. 그리고 나면 끝이다. 한번 실수를 하게 되면 '걔 연출 못쓰겠던데'란 말이 나오니 그런 실수를 하면 안 된다 .

- '고선웅'하면 '마술적 사실주의'를 많이 이야기한다.

= 처음에 그쪽에 완전히 꽂혔었다. 예를 들면, 엄마가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다가 이미배의 <안개>를 불렀다. "당신은 안개였나요" 이런 노래를 부르시다 "내가 죽으면 내 무덤가에는 안개꽃이 만발할거여" 그랬는데, 나중에 무덤에 진짜 안개꽃이 만발한다. 이런 게 마술적 사실주의다. 말이 안 되는데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아베 코보의 작품 <모래 여자>라고, 땅 속 모래 수십 미터 밑에서 사는 여자 얘기 - 말이 안 되는 - 를 다뤘었다. 그걸 통해서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뤘는데, 이게 우리 연극에서 보여줄 수 있는 창의적인 접근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그런데 살다보니 그것만 할 수는 없더라. 저한테 의뢰 들어오는 것도 있고, 또 계속 작품을 해야 하기도 하니. 그렇지만 지향은 그렇게.

- 다작을 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

= 극단(마방진 극공작소)이 있으니까. 단원들이 40명이나 되니 작품을 올려야 한다. 사실 그렇게 해도 못 먹고 산다. <아리랑>은 3년을 준비하는데.

체력적으로 염려도 되고 겁이 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 때라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 마음이 동해서 '아닌 것 같다. 고선웅이 너, 작품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라고 마음이 들면 그때부터는 다 안 할 것이다 .

- 죽을 때 이 작품으로 고선웅이라는 연출가가 기억되면 좋겠다하는 작품이 있다면?

= 제 작품 다 좋아한다. 다 좋고, 다 인상적이었다.

- 본인이 만든 걸 보는데도 그런 감정이 일어나나?

= 내가 만들었다고 볼 수 없다. 같이 참여한 것이다. 연출이라고 해서 '이거 내 작품이야'라고 하면 그건 이상한 사람이다. 다 같이 하는 것이다. 다 같이 .

- 마지막 질문이다. '고선웅'하면 사람들이 무얼 떠올리면 좋겠나 ?

= 아... '걔 작품 재미있어' 이러면 좋겠다 .

고선웅 연출을 만난 날은 월요일이었다. 일주일 중 공연이 없는 단 하루. 술독에서 조금 전 빠져나온 듯 한 그가 신파를 설명하며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그런데 당신은 왜 날 사랑하지 않는 거요? 내 마음이 두 동강이 난 것 같소" 라고 대사를 읊는데, 순간 무대 앞에 앉아 있는 듯 착각이 일었다. 고선웅이라는 배우를 짧은 순간이나마 '독점'한 기분이 꽤 좋았다.

삶과 연극을 매일같이 넘나들면 삶을 연극처럼, 연극을 삶처럼 살게 되지 않을까? 그가 지향한다는 마술 같은 현실들이 '재미'라는 조미료와 삶 속에서 어떻게 버무려졌는지 발견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그의 삶 속에서 그것이 발견된다면, 팍팍한 우리들 삶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과 함께.

인터뷰 및 정리: 심나리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선임연구원

* 이 글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