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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03일 15시 46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5월 03일 14시 12분 KST

프로페셔널과 빌어먹기

"오늘날 우리는 누군가가 생계를 이어가는 방도로 팔뚝을 쓰든 머리를 쓰든 간에 그 이유로 그를 비하하지는 않는다. 변호사 노릇이 장사보다 윗길이라고 믿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실인즉 프로페셔널은 얻어먹고 사는 것이다. 그가 사회의 상부구조에 있다는 것이 그의 밥벌이가 고귀하다는 증명이 되어 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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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3년에 태어났다. 내가 어릴 적에 본 거지들은 대개 전쟁고아였는데 모두 깡통을 들고 다녔다. 그들은 대부분 반찬통을 따로 가지고 있지 않아서 밥통이 늘 밥과 김칫국물로 벌겋게 범벅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먹을까, 어린 눈에도 보기 딱했다. 내가 거지가 아닌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가 난 날, 하숙집에 들어가 보니 하숙생들이 당자도 없는 축하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나이 많은 이는 평소 교제 술을 매일 마셔야 하는 것이 제일 괴롭다고 하던 터였다. 그가 경상도 억양으로 내게 말했다. "정형은 이제 생전 더러븐 꼴은 안 보고 살게 된 거라예."

판사 노릇 한 지 몇 해 되었을 때 부모님께 목돈 드릴 일이 있어 아내에게 돈 있느냐고 묻자, 난처한 표정과 함께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당신 판사 해서 우리가 육 년간 모은 돈이 이백만원이에요." 치과의사를 하는 고교 후배를 만난 자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가 이렇게 타일렀다. "형, 그래도 우리는 야단 맞고 사는 직업은 아니잖아요. 야단을 치기만 하면 된단 말입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소견이 멀쩡했지만, 어딘지 개운치는 않았다. 살면서 더러운 꼴을 보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좀 억울했던 것이다.

판사 노릇하는 동안 내내 그것이 벌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건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매일 밤늦도록 그리고 주말도 없이 일해야 하는 처지가 억울했고 그에 비해 월급이 적지 않은가 싶어서 또 억울했다. 그게 얼마나 아집에 사로잡힌 생각이었는지 안 것은 나중에 나이 들어서였다. 나는 억울한 게 아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판사 자리도 벌이였고 판사가 받는 월급도 적지 않았다.

벌이란 고귀한 것이다. 실은 인간활동의 핵심이다. 소설가 김훈은 그의 산문집에서 이렇게 썼다. "남자가 할 일은 일언이폐지하고,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는 일이다." 그 벌이 중에 다소 특이한 것이 있다. 일컬어 프로페셔널인데, 이것은 본래 서양이 밟아온 역사의 산물이다. 신사가 할 공부가 네 개인데, 신학, 철학, 법학, 의학이며, 신사가 할 직업이 네 개인데 성직, 교수, 법률가, 의사라는 것이다. 프로페셔널은 이를테면 이런 자리다. 공부 못하는 학생이 선생을 나무라거나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교육 서비스의 수요자가 되어 돈을 내는 학생이 그 공급자가 되어 돈을 받는 선생에게 외려 자기가 공부 못한다며 죄송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짜임새가 바로 프로페셔널의 특권이다. 성직자나 교수나 법률가나 의사는, 그 역무의 소비자에게서 야단을 맞지 않는다. 외려 신도나 학생이나 의뢰인이나 환자를 야단치는 일이 많다. 내게 밥을 먹여주는 사람들과 부딪히면서도 더러운 꼴일랑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 구조가 아만을 키우는 것임을 안 것도 나이 들어서였다. 내 직업은 남과 다르다는 인식, 내가 하는 일은 고귀하다는 인식은 아만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잘못된 인식에 사로잡혀 살아온 세월이었다. 나는 오십 넘어 변호사 개업을 하고 한참을 지나고서야 그걸 깨달았다.

변호사가 상인인지 아닌지를 놓고서는 대법원 판례까지 나왔을 정도로 논란이 있다. 그런데 내 보기에 변호사가 스스로 장사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 직업의 공익성을 생각하는 점에서는 가상하려니와, 자칫 그런 인식은 아상을 키운다. 장사치보다 낫다면 그것은 변호사의 사회적 책무를 생각해서일 뿐이고, 벌어먹고 산다는 관점에서는 변호사가 더 나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블랙먼 대법관은 변호사의 광고 금지를 깬 역사적 판결(Bates v. State Bar of Arizona)의 집필자로서, 변호사의 직업이 가지는 특성상 광고를 해서는 안 된다는 변호사단체의 주장을 이렇게 반박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누군가가 생계를 이어가는 방도로 팔뚝을 쓰든 머리를 쓰든 간에 그 이유로 그를 비하하지는 않는다. 변호사 노릇이 장사보다 윗길이라고 믿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실은 밥을 비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부처님도 밥을 빌었다. 일하기 싫어서였을까. 중국의 선사들은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고 일렀지만(一日不作 一日不食), 부처님이 그런 이치를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밥을 빌어먹는다는 것, 그 찜찜한 기분, 그 어쩔 수 없이 모욕적인 상황 속에서 부처님은 자기 자신이나 비구라는 이름의 수행자들에게 아상을 버리도록 매일 일깨운 것이었으리라. 이것이 바른 자세다. 나 잘 나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실인즉 프로페셔널은 얻어먹고 사는 것이다. 그가 사회의 상부구조에 있다는 것이 그의 밥벌이가 고귀하다는 증명이 되어 주지는 않는다.

실상은 이렇다. 사람으로 생겨난 이는 모두 얻어먹고 사는 것이다. 밥 한 술에도 인간이 이 세상에 나와 살기 시작한 이래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다. 과학은 우리의 몸을 이루는 성분이 태양에서 왔다고 가르친다.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은 근본에 있어 햇빛으로 이루는 광합성작용에서 생겨난 것이며 광합성작용이야말로 생명 유지의 기본적 메카니즘이다. 천지는 불인(不仁)이려니와 그 천지가 사람을 낳고 키우고 살리는 것이며, 그리하여 사람은 천지에게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모두 얻어먹고 산다. 사람으로 태어나 먹고 사는 이는 그러므로 모두 고맙고 겸허한 마음으로 살 일이다.

밥을 빌어 살아가는 이 모든 인연에 감사하면서, 감사하지 못했던 아만의 날들에 나는 부끄럽다. 어려서 나는 거지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이제 나는 이나마 깨쳐 다행이다. 프로페셔널인 나, 얻어먹고 산다, 아니 빌어먹고 산다는 깨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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