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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9일 13시 08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12월 29일 13시 08분 KST

실력만큼 중요한것이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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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개인적으로 1인 디자인 기업가로 일하는 디자이너에게 실력만큼이나 중요한 게 관계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이 속담은 대한민국에서 관계라는 단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디자인도 비즈니스다. 한국에서의 비즈니스는 상당수 관계에서 출발한다. '실력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실력으로 커버되는 시장도 있고 관계로 만들어지는 시장도 있다. 실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시장은 실력이 약해지면 없어지는 유한 맵이고 관계로 만들어지는 시장은 무한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무한맵이다.

이번 글에서 다루는 관계는 갑과 을로 대변되는 클라이언트와의 관계가 아닌 상생과 협력을 할 수 있는 파트너와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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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퇴사를 잘해야 한다. 사직서 내고 다음날부터 출근 안 하는 그런 퇴사가 아니라, 적을 만들고 나오지 말라는 이야기다. 퇴사를 하는 순간 다니던 회사와 라이벌이 되는 게 아니다. 디자인판이라는 전쟁터에서 함께 싸워나갈 수 있는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난 두 번째 회사를 나올 때 거짓말을 하고 나왔다. 아이러니하지만 사장님을 존경하기도 했고, 또 정말 잘해주셨기 때문에 차마 경쟁사로 이직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가업을 잇는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나왔다. 당시엔 너무 어렸기에 관계에 대한 생각을 전혀 못했다. 이직한 후 우연한 기회로 내가 경쟁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그때 사장님의 놀란 표정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마지막 퇴사 때는 독립을 알리고 나왔다. 어차피 같은 바닥에 있으면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는 걸 학습했으니 속시원히 터놓고 나온 것이다.

내가 퇴사하며 생긴 업무공백을 메우기 위해 회사는 나에게 외주를 줬다.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유시민(전) 장관이 대통령께 보고하는 보고자료였다. 똑같은 디자인 서식과 기획 툴을 사용해 만들었지만 회사 소속이 아닌 독립 디자이너로 처음 진행한 작업이었다.

퇴사하는 디자이너를 대하는 회사 입장에서는 서운하긴 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검증된 파트너사가 하나 더 생기는 샘이니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독립한 개인이 바로 경쟁자가 될 수는 없다. 규모나 매출면에서 상대가 안될 테니 말이다. 내가 만약 마지막 퇴사 때도 이 바닥을 떠난다는 거짓말을 하고 나왔다면 내게 첫 매출을 만들어준 그 일을 맡을 수 있었을까?

물론 그 회사가 아직도 내게 일을 주지는 않는다. 영원한 아군은 없으니까. 그런데 영원한 적도 없다. 내가 독립한 지 8년쯤 됐을 때였을 것이다.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첫 번째 카페를 열고 근처에 연구실로 쓸 공간 공사를 하던 중이었던 터라 정신없는 상태에서 전화를 받았다.

'인호 씨 잘 지냈어요? ooo예요.'

너무 오랜만에 들어본 이름이라 순간 고민했는데 이내 생각났다. 거짓말하고 나왔던 두 번째 회사 사장님이었다. 반갑기도 했는데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그제야 거짓말에 대한 사과를 했다. 사장님은 웃으며 옛날 일을 뭘 사과까지 하냐고 말했다. 회사의 주력업종이 바뀌며 예전에 하던 일을 외주 화하고 있는데 일을 의뢰하겠다며 나를 찾은 것이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고 적지 않은 매출을 올렸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기회가 있었으나 스케줄이 맞지 않아 고사했다.

퇴사를 하고 만든 내 회사가 기존에 있던 회사보다 크다면 굳이 전 회사와의 관계를 고민해야 할까 싶지만 적어도 1인 디자인 기업을 유지할 것이라면 기존에 다니던 회사는 아주 좋은 파트너사가 될 수 있다. 내가 출신 회사로부터 일을 받는 것 말고도, 내가 수주한 일의 규모가 나 혼자 감당할 수 없을 때 출신 회사를 소개하여주거나 함께 처리해 나갈 수 있다. 그럼으로써 파트너 관계는 좀 더 돈독해질 것이다.

기존 회사의 고객 DB. 약일까 독일까

디자인은 클라이언트 비즈니스라 회사생활을 오래 할수록 고객 db가 축적된다. 독립할 때가 되면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회사 소속으로 거래하던 고객사 담당자들에게 독립 사실을 알릴까 말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존 회사의 고객 db는 독이 든 술잔이다. 독립하자마자 맞을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시기에 기존 회사 고객 db가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단, 해당 고객사 담당자와 오랜 기간 거래를 통해 개인적으로도 돈독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

어쭙잖은 관계일 경우 고객에게 외면받는 것은 물론이고 기존 회사와의 파트너 관계도 깨져버릴 수 있다. 실제로 고객사 정보를 가지고 독립한 업체가 기존 회사로부터 소송을 당하는 케이스를 몇 차례 봤다. 소송 결과가 어떻든 그 두 회사는 평생 등을 지고 살아갈 것이다.

난 독립할 때 아무것도 없이 그냥 나왔다. 마지막 회사에서 팀장으로 일했기에 고객 미팅 시 받은 명함이 명함 책으로 한 권이었지만 그냥 두고 나왔다. 출신 회사와의 의리? 그런 달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그 회사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를 찾을 사람들은 다 찾겠지 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기존 회사 고객들은 날 찾지 않았다는 슬픈 이야기...)

독립한 디자이너에게 관계는 이처럼 출신 회사와의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파트너사와의 관계를 넘어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로 이어지고 이는 사업의 지속성에 기여한다.

이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건 고객과의 관계가 아니다. 고객과의 관계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고(대한민국에서 사업하려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파트너와의 관계인 것이다. 1인 디자인 기업으로써 혼자 전쟁터에 뛰어드는 것보다는 튼튼한 탱크나 장갑차와 함께 전쟁에 임하는 것이 좀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