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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19일 06시 59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8월 19일 14시 12분 KST

우리가 남이가? 그렇지, 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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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기> 『메이드 인 경상도』, 김수박 지음,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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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상도 출신이고 고등학교까지 줄곧 경상도의 한 도시에서만 성장했다. 그러니까, 나는 '경상도 사람'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경상도에 큰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내가 그 지역 출신이라는 것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을 만큼 탐탁치 않아 한다. 심지어 '응사' 열풍이 불 때도 주인공들의 그 강한 사투리가 듣기 싫었다. 원인은 여러가지일 것이다. 큰 목소리, '우리'를 강조하는 것, (특히 남성들의) 위악, 섬세하지 못함 등(오해하지 마시길. 이것도 결국 내 선입견이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치라는 요소가 나의 경상도 기피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지지율과 선거 결과. '콘크리트 지지율'로 표현되는 그 30%의 대다수가 경상도라는 걸 생각하면, 내가 태어난 곳이라는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경상도를 좋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기피증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나는 이내 쓸쓸해졌다. 타인의 특성을 규정하는 사람들의 속내에 깔린 분노와 배척의 의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아내에게 "당신은 너무 까칠해"라고 말한다면 우리 문제의 원인을 아내의 몫으로 돌리는 꼴이 된다. 반대로 아내가 "당신은 너무 예민해"라고 말한다면 나는 아내가 우리 문제의 원인을 '나의 특성'에서 찾고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그만큼 어느 집단의 특성을 규정한다는 건 '내' 문제에는 눈감고 '남'을 탓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기에 위험하다. 경상도 사람의 특성을 규정하는 것은 지역갈등의 원인을 경상도 사람에게 미루게 되는 것이기에 이런 식으로 답할 수는 없었다.

하긴, 그건 마찬가지다. 전라도 사람들을 출신만으로 배척하는 것과 경상도 사람들을 출신만으로 배척하는 게 뭐가 다르겠는가. 물론, '지역색'이나 '지역 문화'라는 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지역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단 질문 자체를 바꿔볼 필요가 있다. '그들'을 규정한 것은 누구인가? '우리'를 규정한 것은 누구인가? 그들, 우리를 규정한 것은 '누구'인가?

이간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누군가가 이간질로 이익을 얻고 있다면, 우리는 싸우는 이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이간질하고 있는 주체를 주목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갈등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를 배척해야 한다.

단순화와 일반화 앞에서 복종하거나 혹은 반대로 반감만을 가지기 보다는, 왜 단순화되었고 일반화되었고 그것이 왜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 누가 이익을 얻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기피하는 그 기준이 '경상도'라는 저차원적인 잣대라면, 나의 기피증도 저급한 것일 수밖에 없다(경상도에서 태어났으니까, 나는 경상도 사람인가? 충청도에서 태어나셨지만 평생의 대부분을 경상도에서 보내신 내 아버지는 경상도 사람인가?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이 결혼하여 태어난 아이는 '어디' 사람인가?). 결국은 나도 경상도 사람이면서, '그래도 나는 예외'라고 변명하는 것은 결국 나의 잣대가 잘못되었다는 증거일 뿐이다. 어차피 인간이란 존재가 잣대나 편견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라면, 그 잣대나 편견을 쪼개고 또 쪼개볼 필요가 있다.

사과가 싫어, 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과의 어떤 점이 싫은지, 싫어하는 나의 태도는 어떤지,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내가 싫어하는 것이 사과가 아니라 신맛이나 붉은색이었을 수도 있다는, 더 근본적인 이유를 깨닫는 순간이 오기도 하니까. 더군다나 그 대상이 인간이라면 더욱 그렇게 고민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우리에겐 더 많은 단어들이 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등 어떤 사람을 묘사하거나 평가하기에 부적절한 단어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단어가 널려있다. 조급함, 느긋함, 성실함, 태만함, 이기적임, 관대함, 폭력적임, 세심함 등. 그리고 그러한 단어를 굳이 거대한 집단에 낙인 찍듯이 주렁주렁 달아둘 필요도 없다. 그건 정당하지도 않을 뿐더러, 정확하지도 않다.

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여, 이 책은 어깨에 힘을 빼고 자신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경상도 대구에서 보냈던 자신의 유년시절을 더듬으며 경상도, 경상도 사람이 과연 '그러한' 것인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 이웃은 어떤 삶을 살아왔던 것인지 조곤조곤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너무나 시덥지 않은 이야기처럼 들리던 것이, 점차 '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의 진지한, 그리고 진심 어린 성찰은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법. 이 책은 그 어려운 목표를 충분히 달성해냈다. 그래서 누군가는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결국은 경상도를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 때문에 실망한다면 작가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걸 의도했을 테니까.

우리는 친구지만 남이다. 우리가 서로를 정말 존중한다면 우리가 남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똑같은 길을 갈 수 없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지만 다르다. 거꾸로 말하자면 서로 달라도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좋아할 수 있다. 친구! 사랑하는 부모님이지만 부모는 남이다. 나의 길을 가려 할 때 부모님의 노파심을 굳은 마음으로 끊어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나의 삶을 살아낼 때 부모님을 더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남이가? 그렇지, 남이지. 하지만 역설적으로 남이기 때문에 연대할 필요가 있고 연대할 수도 있는 거다. 이 책이 경상도에 관한 책이지만, 경상도를 말하지 않는 이유가 이거라고 생각한다. 지역, 학교, 혈연 따위로 우리가 될 수는 없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우리는 다 남이다. 그러니까 '우리'라는 말로 어물쩍 모든 걸 덮고 어깨동무하려는 자야말로 의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