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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10시 40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12월 22일 10시 40분 KST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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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블랙리스트로 지목돼 피해를 본 사례가 감사원 결과보다 6배 많은 2670건으로 나타났다. 2670건 중 개인이 검열 및 사찰, 지원 배제 등의 피해를 본 경우는 1898건, 단체는 772건이었다. 블랙리스트의 실행에는 청와대와 국가정보원, 문화체육관광부는 물론 경찰까지 가담하였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국정원과 경찰에 문화예술인 검증을 요청했고, 이에 경찰청 정보국 간부가 위법적으로 인물 검증을 실시했다. 이는 20일 오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에서 발표한 블랙리스트 관련 중간 조사 결과를 통해 드러났다. 진상조사위는 여러 분야 중에서도 특히 연극, 무용 등의 공연 분야에서 가장 많은 제보와 조사 신청이 접수되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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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발표를 통해 그동안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예술경영지원센터의 블랙리스트 실행 사실이 드러났다. 예술경영지원센터는 2015년 '우수 프로그램 문화원 순회사업'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극단 마실이 최종 선발되자 당해 사업을 폐지했다. '우수 프로그램 문화원 순회사업'은 국내 단체와 해외 문화원의 매칭을 통해 신규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된 사업으로, 총 3단계 심사를 거쳐 진행되었다.

2015년 2차 심사를 통과한 단체는 극단 마실과 극단 하땅세, 극단 북새통 3개 단체로, 모두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극단이었다. 블랙리스트 극단이 선정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인식한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원 중복지원 불가' 원칙을 새롭게 만들어 사업 자체를 폐지했다. 위의 사실은 극단 마실의 손혜정 대표가 사업 폐지에 의문을 품고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했던 흔적이 있었기에 확인이 가능했다.

한편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블랙리스트 지원 배제를 위해 2014년 발생했던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을 이용하기도 했다. 2014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현장예술인 교육지원사업'에 서울연극협회, 한국작가회의, 민족미술인협회, 우리만화연대 등 블랙리스트 문화단체들이 선정되자 사업을 폐지했다. 그리고 언론과 여론의 비판을 의식해, 때마침 발생한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과 배우 우봉식의 자살 사건을 내세워 이 예산을 긴급복지지원 예산으로 급히 변경했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내부 직원 입단속까지 실시한 사실이 국정원 '문체부, 좌성향 단체 참여 현장예술인 지원사업 폐지 방침' 문건을 통해 드러났다.

사업의 폐지와 관련해 2014년 한국작가회의를 비롯한 문인단체들은 "생계가 어려운 예술인들에게 생계비를 지급하는 긴급복지 방식은 단기적 전시 행정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며 "더 중요한 것은 예술가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창작 역량을 강화하도록 이끄는 일인 만큼 구휼 사업이 복지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항의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한겨레> 2014년 4월3일치 '예술인복지재단의 무원칙 사업폐지 규탄' 기사 참고). 검열과 사찰, 지원 배제도 문제이나, 예술가를 구휼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통계를 보면 현장 예술가 대부분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한다. 작품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오히려 작품 활동을 할수록 적자라고 말하는 이들이 대다수다. 지원금을 받는데도 사정이 나아지는 건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을 구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학로에서 만난 한 현장예술가는 "내가 하고픈 말을 검열받지 않고 마음껏 떠들고, 관객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배제하지 않는 게 진정한 문화예술인 복지"라며 "예술가를 구휼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예술 지원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 그들에게 돈이 없지, 가오가 없었나.

한편, 진상조사위는 누리집,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전화, 현장방문을 통해 문화예술인 추가 피해 제보를 받고 있다.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