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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21일 08시 58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2월 22일 14시 12분 KST

안희정 지사에게 기대하는 마지막 '선의'

뉴스1

나는 안희정 지사의 노선과 발언에 대부분 찬성한다. 대연정, 필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에 전폭적으로 동의한다. 새누리까지 참여해도? 새누리가 중심이 되어 민주당이 낙동강 오리알이 된 형태의 이상한 연정이 아니라면 그것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 여러 전제와 조건이 필요하겠지만 새누리가 참여한다는 것은 이미 그 전제와 조건이 충족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므로 썩 내키지는 않지만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이하의 여러 정계개편 구상들, 야3당에 바른까지 포함한 연정이라든가, 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컨센서스가 이미 민주당 내에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야3당 공동정부안은 굳이 안희정 지사만의 구상이라고 할 수도 없으므로 당연히 찬성이다.

연정을 하든 뭘 하든 국회에서 뭔가 만들어내려면 합의를 해야 하고, 합의를 하려면 대화를 해야 한다. 대화다운 대화를 하려면 상대를 인정해야 하고, 그러려면 상대를 신뢰해야 한다. 상대를 신뢰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은 상대의 선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다 자기 잇속 챙기려고 구라를 떨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무슨 신뢰가 생기겠으며, 무슨 대화를 하며 무슨 합의를 할 수 있겠는가.

안 지사의 맥락과는 좀 다른 얘기지만 나는 많은 국민들이 정치인이라고 하면 다 도둑놈에 날강도에 사기꾼쯤으로 취급하는 데에 불만이 많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고 정치인을 갖고 노는 조크가 없는 나라가 없는 걸 보면 전혀 허황된 얘기는 아닌 것 같지만, 국회를 오래 출입했던 내 경험으로 보면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최소한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양아치는 아니다.

그런 배경으로 본다면 신뢰를 바탕으로 툭 터놓고 얘기한다면 진영의 이익이나 진영논리를 벗어나 우리 공동체의 공영을 위해 서로 다른 입장에서도 함께 지혜를 모아나갈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려면 가끔 뒷박을 맞는 일이 있어도 " 다 잘 하려고 그러다 저러는 것이겠거니" 하고 믿어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부산에서 한 얘기도 조크였니, 반어법이었니 하지만, 그의 기본 맥락은 선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혹시 이명박, 박근혜가 선의가 있었더라도 법과 원칙에 어긋나면 그 꼴이 난다"고 해명을 했지만, 그 해명을 다 믿더라도 "법과 원칙을 어겨 그 꼴이 났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의 선의는 믿어줘야 한다"는 맥락이 전후의 발언에 담겨 있다.

그 정도까지 믿어준다면 진영논리에 빠져 있는, 혹은 사악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보수 정치인들이라고 하더라도 각각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의 이익을 위해 툭 터놓고 얘기 좀 해보자는 말에 마음을 열지도 모른다.


선의를 믿다가 가장 크게 당한 사람이 누군가. 바로 지난 대선 때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박근혜를 찍었던 사람들이다.


나를 조금 알게 된 사람들이 거의 예외 없이 하는 얘기가 있다. "살면서 큰 사기 안 당하셨으면 정말 다행이었겠네요." 듣기 좋게 돌려 말하는 것이지만 내 성격이 사기 당하기 딱 좋은 성격이라는 얘기다. 그렇다. 나는 사람을 잘 믿는다. 그래서 몇 번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크게 당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내가 무슨 지혜가 있거나 머리가 잘 돌아가서가 아니다. 워낙 가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진 게 없으니까 당해도 크게 당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문재인 대표든, 안희정 지사든, 이재명 시장이든 우리가 그들 중 하나를 기를 쓰고 밀어올리려고 하는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그 자리에서 선의니 신뢰니 하면서 아무나 덥석 믿었다가 당하게 되면 아무리 조금 당해도 너무 크게 당하는 자리다. 조금만 당해도 수조 원이 날아가고, 수만 명이 직장을 잃으며, 수십만 명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 수도 있는 자리다. 나처럼 "다행히 크게 당한 적은 없어요"라며 자위하는 게 불가능한 자리다.

그런 선의를 믿다가 가장 크게 당한 사람이 누군가. 바로 지난 대선 때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박근혜를 찍었던 사람들이다. 우리야 애초부터 그를 믿지 않았으니 당했어도 크게 억울하지 않지만, 그 분들은 그야말로 거대한 대국민사기극에 정통으로 당한 분들이다. 그 분들이 가지고 있던 것이 바로 안 지사가 강조해 마지않는 "선의에 대한 신뢰"였다. 안 지사가 "21세기 신지성"이라고 표현했던 식으로 박근혜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그의 모든 말을 "최선을 다한 선의로 내린 결론"으로 받아들였던 분들이 바로 그분들이다.


그의 진의는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겠지만 그는 이미 보수의 지지를 받는 보수 후보가 돼버렸다.


안희정은 기울어진 운동장의 반대쪽 편에 올라선 최초의 야당 후보가 됐다. 지금 민주당 일부에서만 반발하고, 이때다 싶어 스크래치를 내려는 국민의당만 목청을 높이고 있지, 만약 문재인이 같은 얘기를 했다면 십자포화를 퍼부었을 민주당 비주류와 진보 언론은 조용하기만 하고, 노무현이 대연정을 얘기했을 때 듣보잡의 꼼수 쯤으로 밟아버렸던 보수권 정당과 보수 언론은 찬양 일색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이제 안희정에 대해서 거의 마음을 돌린 것처럼 보이지만, 안희정 돌풍의 주력인 중도와 보수는 그가 손석희에 당하는 모습을 보고 어쩌면 더 결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 안희정은 진보적인 의제를 언급하기가 어렵게 됐다. 솔직히 말해 그의 머리 속에 진보적인 의제가 담겨 있을지부터가 의심된다. 그의 진의는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겠지만 그는 이미 보수의 지지를 받는 보수 후보가 돼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갈등의 정치를 끝내야 한다는 그의 의지에는 공감한다. 이제 만약 그의 뜻대로 갈등의 정치를 끝낼 수 있는 실마리가 마련된다면 그 토대 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얘기할 차례다.

대연정이든 소연정이든 연정을 해야만 한다는 뜻은 알겠고, 그럴 때 상대를 적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선의를 가진 존재로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렇게 해서 야당에서도 기꺼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협력하겠다는 자세가 됐다고 치면, 그들과 손을 잡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이제 얘기해야 한다.

설마 보수세력의 선의를 인정한다고 이제 다 죽어가는 낙수이론을 다시 들고 나오거나, 노동시장 유연화를 창의적으로 강화시킨다거나, 압박을 통한 북핵 해결에 손을 들어주지 않기만을 빈다. 이게 그에 대해 내가 기대하는 마지막 '선의'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을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