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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02일 11시 56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2월 02일 14시 12분 KST

처맞을 각오하고 쓰는 한국 집회 비판

촌스럽고, 촌스럽다.

나는 집회장의 촌스러운 음악이 거슬린다. 80년대 이후로 노래가 바뀌지 않은 것 같은 촌스러움이다. 그래서 집회장에 갈 때마다 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받고, 고리타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집회장에서 들리는 음악, 민중가요(=민가)는 트렌디한가? 전혀. 아, 집회는 트렌드를 따르면 안된다고? 알겠다.

민중이란 단어가 좋은 뜻이란 건 알겠다. 그런데 사람들이 별로 쓰지 않는 단어라는 것, 생소한 단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총궐기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별로 안 쓰는 단어다. 거리감이 느껴진다. 뭔가 이마에 천을 둘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투쟁적이다. 너무도 투쟁적이다. 누구 하나 멱살 잡고 구석에 끌고가서 겁나 때려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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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엔 아무것도 없다.

청와대로 가자고 한다. 뭘 위해? 가면 뭐함? 청와대엔 말 안 통하는 누나만 있을 따름이다. 가봐야 뭐 없다. 정말이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최근에 어떤 분이 내가 쓴 글에 댓글을 남겼다. 권력자의 헤드쿼터이니 점령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 이런 주장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현실적으로 점령이 불가능하다. 둘째, 점령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지배자의 목을 따야 한다는 자들의 문제는 체제 파괴 뒤에 아무런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청와대 못 간다. 못 간다고. 절대 못 가. 공성전에서부터 게임이 안 되는데 뭔 모가지를 이야기하나. 폴리스라인 근처에만 가도 물대포 쏴대는데 무슨 꿈꾸는 이야길 하나(이제 식용유도 뿌린다며?). 이미 장비에서부터 게임이 안 된다. 그럼 전략을 바꾸는 게 맞다. 사람 하나 죽어서 전국민적인 분노라도 이끌어내려는 겐가? 꼭 그런 식으로 피를 봐야 하나? (내가 지금 경찰의 과잉진압을 옹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국어공부 다시 하고 오시길 바란다) 꼭 그때의 방식으로 해야 하나?



함께하고 싶은 집회

평소에 집회장에 가지 않는 이들도 집회에 매력을 느끼고 참여하게끔 해야 한다. 지금의 집회는 그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 촌스러운 음악과 아무도 쓰지 않는 단어들로 도배한 포스터로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없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들로 인해 모이지 않았냐고? 웃기는 소리다. 사람들이 모였던 것은 그냥 어떤 이슈에 빡쳐서 모였던 거지 촌스러운 음악과 포스터의 구호 때문에 모인 게 아니다. 사람들을 모았던 이명박과 박근혜지 민중가요가 아니란 이야기다. 즉, 날짜만 홍보해줬어도 사람들은 모였을 거다.



시위는 반드시 투쟁적이어야하는가?

촌스러운 음악과 '민중총궐기'같은 단어들은 시위에 투쟁적인 성격을 부여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연단에 나와서 "동지 여러분!"으로 끝을 맺는 아제들의 발언도 시위에 투쟁적인 성격을 부여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우리나라에서 시위는 '투쟁'의 성격이 강하다.

물론 집회에 '투쟁'의 성격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시위가 투쟁적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투쟁적이지 않은 집회나 시위도 있을 수 있고, 그런 집회나 시위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마에 천을 두르고 눈알을 부라릴 정도로 공감하는 자들만 참여할 수 있는 집회여야 하는가?

시위는 반드시 투쟁적이어야 하는가? 집회와 시위가 헌법에 의해 보장받는 이유는 그것인 표현의 자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함의하는 것은 집회나 시위가 표현을 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라는 것이다. 시위가 투쟁적이어서 헌법의 보장을 받는 게 아니라, 투쟁적일지라도 표현의 자유에 속하기에 헌법적 권리로 보장받는 것이다. 이 둘을 혼동하면 곤란하다.



더욱 효과적인 표현을 위하여

언론사가 더 쉽고 빠르게 뉴스를 전달하기 위해 포토뉴스라는 형식을 채택하는 것처럼 집회나 시위를 기획함에 있어서도 무엇이 더욱 효과적인 표현방식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집회는 언제부턴가 변화를 멈추었다. 언제부터인진 모르겠다. 다만 변화가 멈췄으며, 변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럴 여력이 없다", "지금의 집회는 수많은 고민의 결과물"이라는 식으로 지금이 최선이라는 레토릭을 선사한다. 이런 레토릭을 전해들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앞으로도 집회, 시위의 형태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 정도다.



연단은 아젠다를 축소하고, 배제한다.

보통 우리나라의 집회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1)모인다. (1.1)모이는 중에 촌스러운 음악 (2)연단에서 아제들이 "동지 여러분!"한다. (3)박수 (4)연단의 어떤 아제의 이동 제안(보통 청와대로) (5)이동 (6)차벽 (7)물대포 (8)차벽 (9)물대포 (10)차벽 (11)물대포 (12)버스 (13)차벽 (14)물대포 (15)연행 (16)연행 (17)연행. 아마 12월 5일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 고리를 없애려면 '연단'을 없애야 한다. 집회를 통제하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집회는 타국의 집회와는 다르게 거대한 연단이 있고, 그 연단에 선 자들이 집회자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해낸다. 그렇게 되다 보니 우리나라의 집회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담기기보다는 연단 아제들의 목소리로 아젠다들이 축소된다. 그리고 그 아제들은 이마에 흰 천을 두르고 '투쟁'을 외친다. 집회의 성격마저 규정된다.

물론 집회에는 '투쟁'을 외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나는 그들이 그 자리에 없어야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투쟁'을 외치지 않으면서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연단은 그런 자들의 목소리를 의도를 했건 안했건 결과적으로 차단하게 된다. 그렇게 아젠다는 축소되고, 집회의 성격도 특정한 방향으로 포지셔닝되고, 결과적으로 집회를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어 거리감이 느껴지게 한다.

* 이 글은 <브런치>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