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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02일 12시 52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2월 03일 14시 12분 KST

죽 쒀서 개 준 패러디 〈더러운 잠〉

이구용의 〈더러운 잠〉은 실망스러운 패러디였다. 권력비판을 위해 여성혐오를 이용하는 낡고 뻔한 기법 이외에 새로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작품이 여성혐오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작품에 중첩된 복잡한 권력의 위상을 보지 않으려는 게으른 변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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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올랭피아(Olympia)〉, 18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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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쿠르베미술관에 걸려 있는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세상의 근원(L'Origine du monde)〉, 1866년.

물론 여성을 나체로 표현한다고 해서 모두 여성 대상화, 즉 여성혐오인 것은 아니다. 가령 마네의 〈올랭피아〉는 매춘여성의 나체를 전시하고 있지만 매춘부의 시선은 오히려 보는 자를 빤히 응시한다. 대중문화평론가 황진미의 말대로 교환의 대상일 뿐이라고 여겨졌던 매춘부의 나체는 이 되돌려주는 시선으로 인해 저항성을 획득한다. 따라서 이 그림에서 여성은 단순히 남성 주체에 의해 지배당하는 수동적 대상으로서의 육체가 아니다. 다른 예로는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을 들 수 있다. 여신이나 매춘부의 누드화에서 여성의 음부가 가려진 것과 달리 〈세상의 근원〉은 인간의 몸에 난 구멍, 여성의 성기를 직시하게 만든다. 이 그림에서 표현된 여성의 나체는 자지의 없음이 아니라 보지의 있음이다. 없음이 아니라 있음으로 표기되는 여성 나체는 열등하지 않다. 따라서 이 그림은 남성들에게 공포감마저 준다.

그러나 이구용의 작품에서 박근혜의 얼굴은 시선을 되돌려 줄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거기서 여성은 보이는, 수동적인, 무능력한 몸으로 그려진다. 또한 이 작품에서 여성의 음부는 부끄러운 듯 손으로 가려있다. 여성의 나체는 곧 자지 없음이다. 자지 없음이 곧 열등함인 이 구도에서 여성들은 남근인 척할 수밖에 없다. 주사다발로 상징되는 외모 가꾸기는 필살기다. 자지 대신하는 듯 배 위에 놓인 사드 역시 남근인 척하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여성성은 어디까지나 남근이 거세된 여성의 남근인 척하기에 불과하기에 '여성' 대통령은 세월호의 침몰 앞에 무능력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왜 이구용의 작품이 여성혐오를 강화하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이 작품에서 여성은 아무런 능력을 갖지 않는 텅 빈 기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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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의원회관 로비에서 열린 '곧, 바이! 展'에 전시돼 있다 1월 24일 보수단체 회원들에 의해 훼손된 〈더러운 잠〉.

그러나 사실 이 작품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작품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자고로 민주 사회라면 그런 실패한 작품을 잘근잘근 씹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란 작가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이기도 하지만 그 생각을 대중이 씹을 수 있을 자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씹히기도 전에 퇴출되었다. 처음부터 표현의 자유 따윈 아랑곳 하지 않았던 수구세력에 의해 이 작품은 내동댕이쳐졌다. 인격을 모독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을 위한 자유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예술의 문제를 윤리적 문제로, 나아가 특정 정치인의 처벌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문재인, 새누리당 의원들, 여성 가족부 그리고 몇몇 여성단체의 논리마저도 기본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언뜻 보면 이들의 주장은 맞는 것 같지만 상당히 위험한 폭력의 욕망에 맞닿아 있다. 언뜻 보면 이들은 여성을 옹호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봉인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우선 이들의 주장은 어떤 예술적 표현을 허용하고 허용하지 않을 것인가를 내가 혹은 특정 정치 집단이 독점적으로 가질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여기에는 논쟁의 여지, 씹기의 기회가 탈락되어 있다. 여기에는 예술가와 대중이 자유롭게 맞붙을 권리, 작가가 소통을 통해 작품을 자발적으로 재탄생시킬 기회 등이 박탈되어 있다. 둘째 이 주장은 작품을 보는 대중의 능력을 과소평가한다. 가령 작품을 보면서 남성들은 여성을 더욱 비하하게 된다거나 여성들은 스스로를 더욱 무능력한 존재로 자책하게 될 것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그리고는 여성들을 무능력한 존재로 만드는 여성혐오의 구조를 벗어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여성혐오를 강화하는 작품에 대한 강력한 검열과 통제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러한 섣부른 판단이야말로 여성들의 수동성을 물화시키는 오류를 범한다고 본다. 여성들을 검열적 권력에 의한 보호가 필요한 무력한 존재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의 행위자성은 오히려 비활성화 된다. 강한 검열과 통제는 페미니즘의 독이다.

DJ DOC의 〈수취인 분명〉을 상기해 보자. 촛불정국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이 곡을 검열하여 삭제하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곡에 내재한 여성혐오를 신랄하게 씹었던 것이고 결국 노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재탄생되어 무대에 올랐다. 마찬가지로 〈더러운 잠〉은 검열되어 삭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충분히 씹혀야 할 작품이다. 여성혐오는 그 작품을 눈앞에서 사라지도록 강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의 빈약한 상상력을 조롱함으로써 훨씬 더 잘 극복될 수 있다. 만약 지금이라도 작품 속 국기 안에 박근혜의 얼굴이 아니라 가부장적 권력 카르텔을 상징하는 자지를 그려 넣는다면 〈더러움 잠〉은 현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진짜 패러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