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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5월 18일 11시 22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5월 18일 14시 12분 KST

빈소를 점령한 꼰대 바이러스

전무의 모친상 부고가 전해지기 무섭게 부장은 우리의 순번을 정해주었다. 일말의 상의 없는 일방적인 지정이었다. 나와 L을 1번 타자에 임명하며 즉각 빈소가 마련된 대전으로 출발하라고 지시했다. 퇴근까지 한참 남은 대낮이었지만 부장은 개의치 않았다. 회사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고 임원진의 초상 뒷수발은 그 최우선에 자리하고 있으니까.

한겨레

전무의 모친상 부고가 전해지기 무섭게 부장은 우리의 순번을 정해주었다. 일말의 상의 없는 일방적인 지정이었다. 나와 L을 1번 타자에 임명하며 즉각 빈소가 마련된 대전으로 출발하라고 지시했다. 퇴근까지 한참 남은 대낮이었지만 부장은 개의치 않았다. 회사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고 임원진의 초상 뒷수발은 그 최우선에 자리하고 있으니까.

운전하는 내도록 L은 별다른 말을 않았다. 새삼스러울 것 없다는 평온한 표정으로 엑셀만을 밟아댔다. 문득 형이 생각나서 카톡을 보냈다. 중앙일간지 기자인 형은 사주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빈소에서 여덟 시간 동안 신발의 줄을 맞추며 정리했던 적이 있다. 내가 이딴 짓거리나 하자고 언론고시 패스한 줄 알아? 형은 불콰한 얼굴로 불퉁거렸지만 아버지는 도리어 그런 형을 나무랐었다. 사는 게 원래 그래, 남의 돈 벌어먹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았니? 아버지의 훈화말씀은 이후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물론 그 서두는 언제나처럼 '우리 땐 말이야'였다.

대전의 빈소에 도착해보니 상주가 없었다. 우리가 전무보다 먼저 도착한 것이다. 어쩌면 이게 우리가 부여받은 첫 번째 미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정에 두 차례 절을 올린 후 전무의 가족들과 간략히 인사를 나눴다. 서로 낯설고 민망해하는 기색이 은근했다. 그런 우리를 인자한 어머니상의 전형이라고 부를 법한 푸근한 얼굴의 노파가 만면 가득 환한 웃음을 머금고 내려다보았다.

딱히 하실 거 없어요, 방해만 되니까 그냥 저기 앉아 계세요. 우두커니 서 있느니 육개장이라도 날라야겠다는 생각에 주방으로 가자 상조회사에서 나온 도우미들이 우릴 제지했다. 다소 경계하는 낌새이기도 했다. 우리 같은 이들 때문에 자신들의 일자리가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걸까? 몇 차례 가벼운 실랑이가 오간 끝에 L과 나는 주방에서 쫓겨났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라고는 호상이라며 허허 웃고 술잔을 나누는 이들 틈바구니를 이리저리 부유하며 눈치를 살피는 게 고작이었다. 2번 타자에게 타석을 인계하기까지는 아직 여섯 시간이나 남았다. 심지어 상주인 전무도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대체 내가 왜 여기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거북함이 애써 억누르던 불경한 질문을 기어이 끄집어내고야 말았다. 그렇다. 지금의 난 단지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일방적으로 동원된 싸구려 부품일 뿐이다. 명색이 주식회사인데 이런 식으로 사원의 노동력을 빼돌려 사적으로 착취하는 건 사실상의 횡령 혹은 배임이 아닐까? 잠시 이리 생각해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의 시간과 나의 감정, 그리고 나의 존엄에 대한 존중은 애초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난 분명 내 손으로 입사원서를 냈고 그건 포기각서와 동의어다.

영정사진 속 노파의 인자한 웃음이 이젠 비웃음으로 여겨진다. 망자에 대한 예의 따위 냅다 걷어치우고 삿대질을 해대며 저주를 퍼붓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나를 약 올리듯 형의 카톡이 도착했다. 그 안엔 아버지가 형에게 건넸던 훈화말씀이 마치 복사라도 한 듯 그대로 담겨 있다. 아마도 형 역시 '꼰대'라고 이름 붙은 불치의 전염병에 걸린 모양이다. 꼰대 바이러스의 무차별 난사엔 동생인 나도 예외일 리 없다. 과연 나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난 그저 숙주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 걸까? 잠복기간도 전파경로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서서히 내 목줄을 죄어온다.

한겨레의 <2030 잠금해제> 꼭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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