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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06일 09시 03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06일 14시 12분 KST

미국 로스앤젤레스 '아메바 뮤직' | 세상 모든 음반들이 무한 증식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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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ww.amoeba.com

믿는 자여, 나를 따르라. 로스앤젤레스에 가면 천국이 있다. 당신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음반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언컨대 이보다 더한 천국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곳을 접한 건 영화평론가 이동진 선배의 선도 때문이었다. 영화 <페이첵>의 오우삼 감독과 주연배우 벤 애플렉 인터뷰 차 로스앤젤레스로 출장을 갔는데, 함께 간 선배가 기자들 몇몇을 소환했다. 여긴 꼭 가야 할 곳이라고. 바로 할리우드 로드에 위치한 '아메바 뮤직(Amoeba Music)'이었다. 기자단이 묵는 숙소는 비버리힐즈에 있는 한 호텔이었는데,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리처드 기어의 펜트하우스가 이 호텔 꼭대기 층에 있었다. 숙소에서 한 발자국만 걸어 나가면 줄리아 로버츠가 쇼핑백을 들고 활보하던 명품가가 펼쳐진다. 바꾸어 말하면 백날 그 거리를 돌아다녀봤자 내가 건질 물건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터뷰가 끝나고 남는 오후를 보내기에 그보다 더 좋은 제안도 없어 보였다.

『맛의 달인』이라는 만화에 나오는 음식점들을 보면 입에서 살살 녹는 최고의 장어를 선보이는 집이라 하더라도 외관은 허름하기 그지없다. 아메바 뮤직도 그랬다. 택시에서 내려 입구에 도착하니 그저 낡은 유리문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웬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규모가 몇 평이나 되는 걸까. 일목요연하게 늘어선 음반의 행렬이 매장을 가득 채운 채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복도식으로 CD 선반이 배열된 다른 음반 매장들과 달리 이곳은, 책상 높이의 선반에 CD가 정리되어 있었다. CD 한 장의 물질이 가지고 있는 얇기로 가늠해볼 때, 도대체 이 안에 몇 장의 CD가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매장에서 음악을 들어볼 수 있었는데 만약 이 음반들을 다 들어볼 작정을 하고 듣는다면, 평생 이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아메바 칩거 유형'의 인간이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핫트랙스 매장으로 나갈 음반들의 도매상이라고 해도 반박할 여지가 없는 끝없는 음반들. 20개 이상 늘어선 계산대를 보니 대형 마트 같기도 하다. 아니 'CD 팩토리'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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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에 습격을 당한 듯 멍해진 나를 두고 같이 온 기자들은 어느새 팩토리 선반의 흐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웬만큼 사람이 들어와도 아메바 뮤직이 보유한 CD의 압도적 물량에 당해낼 재간이 없는, 어디를 둘러봐도 CD의 천국이다. 록, 힙합, 일렉트릭...... 아는 뮤지션들의 이름을 읊고 꺼내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더 놀라운 건 가격이었다. 1달러, 1.99달러짜리 음반도 한둘이 아니었고, 같은 음반도 상태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세계 최대의 독립 음반 매장인 이곳은 음반 보유량과 가격의 이점까지 더해지면서 이미 정평이 난 곳이었다. 중고 음반뿐만 아니라 신보도 취급하며, 2층에는 음반 외에 DVD, 카세트테이프, 잡지, 포스터 등도 판매한다. 1990년에 버클리에 1호점이 문을 연 이래 2호점인 샌프란시스코 매장이 연이어 생겼다. 내가 간 로스앤젤레스 점은 3호점인데, 규모 면에서 이곳이 가장 크다고 한다. 2층엔 한국 영화 섹션도 있었는데 이제는 기억에서 사라진 한국 영화 <아프리카 아프리카>가 빈약한 섹션을 채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2층으로 올라가야 하는 이유는 1층의 음반 매장 때문이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순간, 아메바 음반 매장의 규모가 더욱 스펙터클하게 한눈에 펼쳐지는데, 이건 마치 터키의 카파도키아에 가서 높은 봉우리에 올라 끝없이 펼쳐진 기암괴석을 내려다볼 때의 감흥이라고 하면 과장이려나. 이렇게 멋진 곳에서 상시적으로 뮤지션들의 음반 공연도 열린다고 한다. 벽면을 가득 채운 공연 소식과 밴드 구인 광고가 한가득이니,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 <원스>나 <비긴 어게인>처럼 인디 뮤지션의 꿈을 키우는 이들이 이곳을 놓칠 리 없다.

시간이 흐른 후 계산대 앞에서 다시 기자들을 만났다. 모두 '수색자'의 표정이 되어 귀환했다. 나는 기자들의 수집벽을 잘 안다. 사무실로 매일매일 아마존과 예스24, 알라딘 같은 이름을 단 박스가 배달된다. 보기 위해서, 읽기 위해서라는 목적도 있지만 '갖기 위해서'도 굉장히 큰 이유 중의 하나다. 직업적인 필요에 의해서라고 하더라도 정도가 심하다. 시도 때도 없이 아마존 쇼핑을 하며 각종 DVD를 뜯지도 않고 쌓아두기로 유명한 한 선배는, 정작 그걸 찾을 때는 없어서 새로 구매하는 걸 여러 번 봤다. 산 책을 다시 사는 건 사실 부지기수가 토로하는 경험담이다. 마감 시간이 넘었는데도 청탁한 원고를 주지 않고 연락이 두절됐던 모 평론가에게서는 이런 변명의 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책장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져서 원고 마감을 못했어요 ." 무너진 책장 위에서 원고를 마감했던 그 수집광 필자의 난감한 사건이 떠오른다. 얼마 전 그는 DVD 매장의 휠이 달린 책장을 구매해 자기만의 자료원을 꾸렸다. 품목의 차이는 있으나 책, 음반, DVD의 예판을 구매한다거나, 절판된 책을 상당한 가격에 구매한다거나, 번역이 안 된 작가들의 책을 해외에서 주문한다거나 하는 행위는 흔한 소비의 증상이다.

역시 그런 면에서 이동진 선배의 독서량과 음악 듣기에 자주 감탄하곤 하는데 그날 그가 아메바 뮤직에서 들고 온 CD의 양은, 트렁크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더 사지 못함을 아쉬워하던 기억이 난다. 그날은 호텔로 돌아와 구매한 음반을 CD플레이어에 걸었다. 흥분은 지났고, 음반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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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의 저서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