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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30일 10시 53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30일 14시 12분 KST

뉴욕 브루클린 빈티지숍 '비콘스 클로짓' | 뉴욕 힙스터들의 공인된 비밀 옷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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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카오산 로드에 가면 반나절 만에 옷차림이 바뀐다. TV 애니메이션 <달의 요정 세일러문>의 변신 장면을 연출하듯, 입고 갔던 청바지 같은 건 집어던지고 길거리 숍에서 구매 즉시 헐렁한 태국식 면바지로 훌렁 갈아입어버린다. 4박 5일의 일정이 끝나갈 때쯤이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메고 있는 가방까지도 태국 여행객 차림. 버젓이 태국식 면바지를 사고서도 지나가는 여자가 입고 있는 스타일이 멋져 보이면 어김없이 그 옷을 찾아 헤맨다. 단 돈 몇 천 원으로도 태국 현지의 힙스터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발리에서는 비치웨어 브랜드 '록시' 매장에서 옷을 고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만다. 어제 해변에서 만난 아가씨가 입은 그 예쁜 비치 룩을 나도 입고야 말겠다는 집념의 소산(물론, 그 몸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런 아이템들은 한국에 돌아오는 즉시 소화할 이유도, 소화할 공간도 없어진다는 게 함정이다.

그런 맥락에서 뉴욕에 가면 첼시나 브루클린 거리를 활보하는 힙스터가 되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빈티지 아이템들을 워낙 즐겨 입는 그들의 착장은 보는 족족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저기요? 그런 건 도대체 어디 가서 구매할 수 있나요?" 하고 물어보고 싶은 것투성이.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남의 영업 기밀을 캐묻는,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위다. 사실 묻지 않아도 뉴욕에서는 공인된 답변이 존재하고 있다. 브루클린에 있는 빈티지 매장 '비콘스 클로짓(Beacon's Closet)'은 뉴욕 힙스터들의 비밀 옷장 같은 곳이다. 1997년에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에 문을 연 이곳은 옷을 좋아하는 사람마저도 그 엄청난 옷에 질려서 나올 정도로 다량의 옷을 구비한 뉴욕 최대의 빈티지숍이다. 뉴욕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그곳의 존재를 알고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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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을 들은 나도 브루클린 역에 내렸는데 메모해온 주소가 무색해진다. 눈을 못 떼게 차려입은 예쁜 언니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반대편에서는 벌써 쇼핑을 끝내고 커다란 쇼핑백을 양손에 든 언니들이 걸어온다. 토끼를 쫓아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가 된 것처럼 나도 그 물결을 따라 손쉽게 비콘스 클로짓의 입구에 다다랐다. 문을 열면 잘 정돈된 매장이 힙스터들을 반긴다. 엄청난 양의 옷을 구분하는 기준은 색깔.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으로 섹션이 구획되어 있다.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는 직원의 도움 같은 건 없다. 그저 맘에 드는 색을 골라 입으며 각자의 '컬러 테라피'를 할 시간이다. 탈의실이 잘 갖춰져 있어서 맘껏 입어보고 벗어던져도 된다는 것이 오픈 벼룩시장과는 다른 이곳만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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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들은 다종다양하다. 일단 의상만 보더라도 셔츠나 원피스 같은 빈티지 아이템뿐만 아니라, 부푼 소매와 민망할 정도로 과한 에이프릴이 달린 원피스도 다량 갖추어져 있다. 이런 걸 사서 입지는 못할지언정 시간만 된다면 입어보고 탈의실 놀이를 해보는 것도 괜찮다. 자라 같은 패스트패션도 있고, 펜디나 구찌 같은 명품들도 더러 있다. 빈티지 패션의 꽃이라 할 슈즈도 다양하지만, 뉴요커들의 평균 발사이즈가 큰 편이라 마음에 드는 슈즈를 보고도 내려놓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빈티지 가방과 벨트 같은 소품들도 지나치지 말고 꼼꼼히 챙겨야 한다. 놀랍게도 10달러짜리도 부지기수다. 20~30달러 사이면 꽤 괜찮은 원피스들도 골라낼 수 있으니 가격 경쟁력이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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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콘스 클로짓은 물건의 판매뿐만 아니라 매입도 하고 있다. 옷 잘 입는 뉴요커들이 한꺼번에 옷을 산타할아버지처럼 이고 와서 팔고 가니, 힘들이지 않고 계속 새로운 옷을 순환시킬 수 있는 구조다. 옷을 가져가서 팔면 현금으로는 35퍼센트를, 비콘스 클로짓에서 다시 옷을 살 수 있는 숍 크레디트로는 45퍼센트 할인권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매입한 옷들은 매장 안에 있는 세탁・수선실을 거쳐 깨끗한 상태로 손질되어 다시 판매대로 나온다. 매장에는 계산대 외에 매입만 하는 별도의 카운터가 있는데, 이곳에 서 있는 사람들의 줄이 물건을 사려는 사람 줄만큼이나 길다.

마침 옷을 팔러 온 한국 사람을 만났다. "저는 유학생인데 이제 곧 한국에 들어가거든요. 입던 옷을 다 들고 갈 수도 없고...... 옷과 가구를 처분하는 중이에요." 겨울 코트 몇 벌을 들고 온 그녀는 지난 2년간 비콘스 클로짓의 VIP 고객이었다고 한다. 옷을 사기도 하고 가끔 이렇게 팔기도 하는데 이제는 그게 습관이 됐다고 한다. "뉴욕 사람들은, 특히 젊은 층은 빈티지 아이템들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요. 멋져 보여서 물어보면 빈티지 제품이 많죠. 빈티지 아이템은 부지런한 사람이 노력하는 만큼 가져가는 정직한 세계 같아요." 신고 있는 1980년대 스타일의 레드 힐을 가리키며 이 역시 비콘스 클로짓에서 구매해 잘 신고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훈훈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예쁜데, 이 슈즈 좀 내놓지' 하는 생각을 해버렸다.

처음 윌리엄스버그에 있던 창고형 비콘스 클로짓은 겐사이 스트리트 74번가로 자리를 옮겼다. 출장을 갈 때마다 집에서 입던 옷을 들고 가서 팔고 '새 중고' 아이템을 사온다는 친구처럼, 아예 팔 만한 옷들로 트렁크를 꽉꽉 채워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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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의 저서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