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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01일 06시 56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01일 14시 12분 KST

이탈리아 베니스 기념품 가게 | 욕망을 찍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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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 물욕이 원망스럽다. 뭘 하나 손에 넣고 싶으면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뿐이다. 구하기 힘든 것들을 손에 넣자면 돈을 떠나 몸이 고생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볼품없는 장난감 카메라를 찾아 헤매느라, 베니스 여행의 마지막은 뒤죽박죽이었다. 죽음을 앞둔 중년의 작곡가가 사춘기 소년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삶과 죽음에 관한 철학적인 성찰을 했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배경이 된 그 베니스 거리에서 내 욕망의 지점이 이렇게 바닥을 향해 갈 것은 또 무엇이었나.

시작은 그 며칠 전 무라노 섬에서부터다. 해질녘 노천카페에서 옆 테이블 할아버지들이 마시는 이탈리아의 술을 따라 주문해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카메라를 손에 든 꼬마가 나를 향해 돌진해 왔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을 찾기라도 하는 건지 꼬마는 나를 보지도 않고 셔터를 누르느라 바빠 보였다. 이 작은 예술가의 정체는 독일에서 여행 온 다섯 살 소녀 안나. 온갖 수화를 섞어 소통을 한 결과 이름과 나이를 알아냈다. 훗날 그 아이는 무라노에서 만난 아시아 여성을 어떻게 포착하고, 어떤 기억으로 남겨놓을까. 안나의 카메라에 담긴 내 모습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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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은 집어치우자. 안나의 카메라는 작동이 안 되는 장난감 카메라였다. 셔터를 누르면 눈앞의 전경이 찍히는 게 아니라, 카메라 안에 담겨 있는 풍경이 찰칵찰칵 한 장씩 넘어갈 뿐이다. 뷰파인더를 통해 안나가 지속적으로 본 건 내가 아니라 카메라 안에 이미 장착된 베니스의 주요 관광엽서다. 산마르코 대성당, 리알토 다리, 탄식의 다리, 곤돌라가 떠 있는 운하 등 베니스 풍경의 클리쉐가 모두 조악한 사진으로 담겨 있다. 순간, 어릴 적 대공원에서 샀던 장난감 카메라가 생각났다. 그땐 대공원에 서식하는 코끼리, 사자, 호랑이, 얼룩말 사진이 8장쯤 들어 있는 플라스틱 카메라가 내 장난감 목록에서 항상 큰 부분을 차지했더랬다. 그녀와 내가 좀더 소통이 잘됐더라면, 아마 난 그 자리에서 즉각 구입처를 알아냈을 거다(그러곤 사러 갔겠지). 사실

두 번쯤 물어보긴 했는데, 단어 하나도 통하지 않는 우리 사이의 거리를 직감하고선 급포기했다. 100미터 전방에 그녀의 부모가 있었지만, 귀여운 아이를 앞에 두고 "아이가 참 예뻐요"라는 말 대신, "이 장난감 카메라는 어디서 구입하셨나요?"라고 물어볼 뻔뻔한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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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가 예쁜 아이였던 건 100퍼센트 보증하지만, 그 순간 안나보다 그녀의 카메라가 더 탐났던 내 욕망의 근원은 영화 <내 이름은 노이> 속 장난감 카메라가 연동된 탓이었다. 북유럽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헬싱키의 지독한 날씨, 추위 때문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마을의 공기를 담고 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백색증에 걸린 소년 노이는, 남들이 보기에는 문제아일 뿐이다. 깊게 침잠해 있는 그 아이의 심중을 헤아리자면, 아침에 일어나면 쌓인 눈 때문에 문조차 열 수 없는 그곳의 추위로 쌓인 절망의 깊이와 비례한다. 어쨌든 지긋지긋한 추위 대신 노이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것은 파란 바다와 야자수가 펼쳐진 하와이의 어느 곳이었다. 노이의 생일날 거동조차 힘든 할머니는 하와이행 비행기 표 대신 하와이의 풍경이 8장쯤 담긴 장난감 쌍안경을 선물해준다. 인디밴드에서 활동하기도 하는 다구리 카이 감독의 음악과 만난 하와이 사진은 영화의 비극적인 결말과 어우러졌고, 내게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첨단의 장비와 기자들의 투혼으로 건진 생생한 하와이 사진보다 더 큰 감흥을 주었다. 노이가 일깨워준 장난감 카메라에 대한 욕망은 이후 내 여행지 어디서나 쉬지 않고 발동했다. 독일의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1999년도산 텔레비전 모양의 뷰파인더 안에는 독일어로 Ich hatte einen Traum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나 꿈을 꿨어'라는 뜻으로, 1980년대 인기 TV 시리즈 제목이기도 하다. 아마 스틸컷 같은 게 들어 있었을 것 같은데,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먹통이라 아쉽다. 독일의 영화박물관에서 구입한 작은 텔레비전 상자 안에는 안데르센의 그림책 한 권이 몽땅 차례로 들어가 있었다. 작은 뷰파인더를 통해 뭔가 보이는 건 뭐든 나의 구입을 촉구했다. 사진이 아니더라도 좋았다. 과학 시간에 원리를 파헤치던 만화경 같은 것들도 관광지 어디서나 취급하는 주요 품목 중 하나. 결과적으로 내 서랍 속엔 지금 중국, 일본, 미국 등 여행지에서 구입한 각종 만화경들이 즐비하게 처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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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장난감 카메라 구입기로 돌아가자면 말이다. 안나와 헤어진 직후부터 베니스를 떠나는 직전까지, 난 베니스 관광엽서가 탑재된 장난감 카메라를 찾느라 모든 기념품점을 기웃거려야 했다. 그때 알았는데 베니스에 기념품점의 수는 산마르코 광장을 활보하는 비둘기만큼이나 많다. 혹시나 해서 문구점과 슈퍼마켓도 놓치지 않았다. 성악을 공부하러 이탈리아에 유학 온 학생의 도움이 컸다. 내 사정을 딱하게 여긴 이 천사가, 기념품점 주인들에게 이탈리아어로 장난감 구입처를 물어보는 친절을 베풀어준 것이다. 기차 탈 시간이 다 됐는데, 베니스의 다리들을 뛰어다니면서 장난감 카메라를 찾아 헤매는 꼴이라니! 애타게 찾아 헤매던 장난감 카메라를 손에 넣은 곳은 좀 싱겁게도 광장 구석의 작은 기념품 매대였다. 형형색색의 오페라 가면들과 'VENICE'라는 글자를 대문짝만 하게 새겨 넣은 에코백 사이에 보란 듯 진열되어 있는 대신 매대 구석, 다른 물건들 뒤에 가리어 절대 찾을 수 없게 숨겨져 있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장난감 카메라를 무슨 절판된 희귀본을 발견한 듯 손에 넣으면서, 그 순간에 안나를 다시 떠올렸다. 대체 그 아이는 이렇게 구석에 있는 물건을 어떻게 구입한 거지?

유난히 더웠던 산마르코 광장, 흐르는 땀을 닦으며 뷰파인더를 눈에 댔다. '차르~ 쿡'. 조악한 플라스틱 장난감이 내지르는 무뚝뚝한 소리와 함께 베니스의 명소가 흐리멍덩한 사진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본 베니스의 이미지 중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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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의 저서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