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5년 09월 17일 06시 49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9월 17일 14시 12분 KST

프랑스 칸 벼룩시장 | 은식기와 샤넬백의 찬란한 유혹

2015-09-16-1442396690-8181743-dlghk0.png

칸에 가야 한다. 요트 때문도 아니고, 카지노 때문도 아니고, 그냥 영화로 업을 삼는 기자들의 몸속 세포 하나하나에는 칸에 가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칸국제영화제. 매년 5월이 되면 세계 각국의 거장 감독들의 신작이 프랑스 남부의 코트다쥐르(Côte d'Azur) 해변을 배경으로 공개된다. 단, 모두에게는 아니다. 철저하게 영화 관계자를 위한 행사로, 일반인은 입장이 불가능하다. 허락된 몇몇,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칸국제영화제로부터 배지를 받은 사람들에 한해서다. 배지를 받으려면 영화제 시작 한 달 전부터 법석을 떨어야 한다. 편집장 추천서, 그러니까 '이 기자는 평소 품행이 방정하고 열심히 활동했으며, 취재 기사 작성 능력도 뛰어납니다'를 증명해줄 수 있는 증명서가 필요하다. 기명기사 3부, 지금까지 쓴 기사에 포스트잇을 표시해 챙긴다. 이걸 DHL로 보내고 PDF 파일로도 똑같이 보낸다. 보내는 서류의 양을 누군가 본다면 '아니, 저 사람 파리5대학쯤 유학 가는 건가' 싶을 것이다.

2015-09-16-1442395139-9686789-dlghk1.png

2015-09-16-1442395200-2746265-dlghk2.png

2015-09-16-1442395259-9406938-dlghk3.png

2015-09-16-1442395328-5392199-dlghk4.png

이렇게 해서 심사가 끝나면 화이트, 핑크, 블루, 옐로로 등급이 나뉜 배지를 받게 된다. 모든 시사회와 행사를 줄 서지 않고 무사통과할 수 있는 화이트 배지는 칸국제영화제를 거르지 않고 찾아온, 영향력 있는 매체가 아니면 받을 수 없다. 블루를 받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같은 숙소에서 잠을 잔 핑크 배지의 기자가 나보다 30분 늦게 나와 줄 서 있는 내 앞을 통과해 들어가는 '꼴'을 보고도 반갑게 인사를 해줄 수밖에 없다. 칸국제영화제는 철저한 계급의 세계다.

끝이 아니다. 전 세계 기자들과 바이어들이 집중적으로 한 번에 몰려드니 비행기 티켓 구매와 숙소 예약도 그만큼 발 빠르고 민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숙소를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부동산 에이전시를 통해 방의 개수, 인터넷 랜선, 취사 가능, 헤어드라이어 구비 같은 세세한 항목들을 비교한 후, 열흘 넘게 기거할 아파트 계약서와 금액을 보내면 숙소 예약 완료.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다. 경쟁작과 각종 섹션들의 초청 감독과 배우들을 향한 프러포즈를 할 차례다. 프로그램 발표와 동시에 근 2주는 매일 메일을 보낸다. 누구에게? 영화사, 수입사, 에이전시. '당신의 작품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터뷰 요청합니다.'

2006년 처음으로 칸국제영화제에 갔다. 그해에는 칸국제영화제가 전통만을 고수하지 않고 열린 사고로 전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개막작으로 할리우드 대작 <다빈치 코드>가 선정됐다. 개막작 상영이 열리던 2층 규모의 코닥 씨어터. 칸에 멀티플렉스는 없다. 해변을 따라 오래된 극장이 늘어서 있는데, 주요 경쟁작은 '팔레 거리'를 중심으로 한 극장에서 모두 상영된다. 하여간 나는 그때 알았다. 세상에, 영화를, 그것도, 글로, 써서, 살아가는, 기자가, 이렇게, 많을 수도, 있구나! 대규모 극장 안에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중국어가 한데 섞여 들어왔다. 여기도 기자, 저기도 기자, 저쪽도 기자, 이쪽도 기자. 모두 다 <다빈치 코드>를 보고 리뷰를 쓸 태세를 갖춘 전 세계 각국의 기자였다. 지금은 와이파이 상황이 좋아졌지만, 처음 방문했던 해만 해도 와이파이를 쓸 수 있는 곳은 프레스센터가 유일했다. 기사를 쓰고 사진을 한국으로 전송하려면 프레스센터가 문 닫기 전 9시까지 모든 일을 마쳐야 한다. 서울의 마감 시간과 맞추려면 사실상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정이다. 그럼 노트북을 들고 문 닫은 프레스센터 앞 길바닥에 앉아 새어나온 와이파이를 잡을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면 그게 참, 이게 뭔가 싶어진다. 내 옆으로는 드레스를 (그냥 캐주얼한 원피스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진짜 파티에서 입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턱시도 차림의 남자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페스티벌 기간이면 날마다 파티가 열리는 곳. 대부호나 브랜드가 주최하는 요트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누빈다. 이렇게 드레스가 일반화된 차림인 만큼 칸의 명품 매장의 쇼윈도는 다른 지역과 달리 드레스가 메인이 된다.

2015-09-16-1442395390-2935711-dlghk5.png

2015-09-16-1442395443-4145361-dlghk6.png

파티 피플들 사이로 마감 피플의 비애가 펼쳐지는 동안...... 아, 벼룩시장 이야기. 이곳에도 앤티크 벼룩시장이 있다. 그러니까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의 벼룩시장은 취급 품목도 격식 있는 드레스와 계급제 영화제에 딱 어울릴 우아하고 클래식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주말에 광장 한가운데서 열리는 이 벼룩시장은 부러 찾지 않아도 취재를 하러 돌아다니다보면 마주칠 수밖에 없는 곳이라 눈요기로는 그만이다. 상류층에서 코스 요리 먹을 때나 쓸 법한 애피타이저 포크, 메인 포크, 디저트 포크가 모두 구비된 은수저 세트나 정교하게 세공된 은쟁반, 영화에서 집사가 묘기하듯 한 손으로 물을 따라줄 때 등장하는 입구가 뾰족하고 긴 주전자 같은 것들이 선반 위에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며 늘어서 있다. 가방이나 소품도 물론 많다. 한번은 우리 돈으로 160만 원 정도에 살 수 있는 선명한 오렌지색 빈티지 샤넬 펠트 백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진품이 맞다면 정말 레어템 그 자체였다. 신용카드로도 결제가 가능하다는 판매자의 첨언이 이어진다. 옆에 있던 기자들이 악마처럼 "사! 사! 사! 사! 사!" "나라면 사겠다." "여자 친구가 있으면 사주겠다." 등등 유혹의 말을 아끼지 않았지만 나는 어찌된 건지 그 순간 간신히 샤넬백의 유혹에서 벗어났다.

2015-09-16-1442395507-1040390-dlghk7.png

2015-09-16-1442395566-667503-dlghk8.png

2015-09-16-1442395626-8283700-dlghk9.png

지금 생각해보면 왜 안 샀나 싶기도 하지만, 페스티벌 기간에는 모두가 영화제에서 나눠준 판촉 가방이나 보도자료를 넣을 수 있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조금 물욕이 줄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분위기에서 가장 멋있어 보이는 가방은 화이트 배지를 목에 건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기자가 멘 제3회 칸국제영화제 공식 가방. 올해로 68회째인 영화제에 그런 정도의 연식을 가진 가방이라면 페이크 가죽이라 할지언정 '빈티지' '레어템'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런 모든 수식어를 줘도 아깝지 않아 보였다. 그 낡은 가방은 드레스를 차려입지 않고 길바닥에 앉아 와이파이를 잡아야 하는 직업군의 사람에게는 샤넬백만큼이나 환장할 만한,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그런 아이템인 셈이다.

해마다 5월이 되면 코트다쥐르의 강렬한 햇살과 만난 고풍스러운 주방 용품들이 발산하는 눈부신 빛의 향연이 먼저 생각난다. 햇빛이 은식기를 빛나게 해주었는지, 은식기가 햇빛을 받아 아름다움을 더한 건지. 순차를 논할 수 없는 그런 오묘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만나고 싶다면, 칸의 주말 벼룩시장으로 고고고.

2015-09-16-1442395690-8710884-dlghk10.png

2015-09-16-1442395737-2514579-dlghk11.png

2015-09-16-1442395794-1147165-dlghk12.png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